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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 가슴과 하늘에서 비 내리듯 쏟아지는 젖, 하지만 기대했던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유선(乳腺)이 투시된 대지의 여신이 젖 물리는 장면은 연년생 동생 크리스티나의 탄생으로 ‘미처 다 빨기도 전에 떼어놓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란 기억을 그려낸다.
두 번째는 모유를 송아지에 먹이는 다큐멘터리 장면의 여성이다. 이름은 잊었지만 TV 아나운서가 모유 수유를 거들려고 찍은 홍보물이었다. “나는 언론인으로서 젖가슴에서 우유가 나오는 걸 사람들이 믿게 해주려고 찍었다.” 그녀 말에 중언부언 보태고 싶지 않다.
세 번째 주인공은 말레이시아 출신 우이비훈. 본지에도 소개된 그녀의 사연은 그저 그럴지 모르지만 감동이다. ‘천안시 엄마 젖 먹는 건강한 아기 선발대회’에서 아이가 최고 건강아로 뽑힌 다문화가정 여성이다.
이들 세 여성은 소(우유)나 물소, 염소나 낙타젖을 물리는 인간에게 각자가 선 위치에서 경종을 울린다. 사람마다 락토오스 분해 능력이 다른 것처럼(유럽인 20∼40%, 검은 미국인의 90%, 인디언의 대부분은 우유를 잘 못 먹는다. 한국인은 중간쯤.) 이들을 대하는 느낌이 상이할 수는 있다.
▲ 프리다 칼로, <유모와 나 My Nanny and I>, 1937, 금속판에 유채, 30.5×34.7㎝ |
그런데 워킹맘을 중심으로 우유 먹이기가 당연시됐던 풍조도 이제 바뀌고 있다. 국내 모유 수유율은 25%를 넘나들지만 2000년 초 10%에 비해 의미 있는 변화다. 인류사를 관류한 탄력 있는 가슴에의 욕망을 버리고 자신감, 당당함을 취한 여성이 늘고 있다.
문제는 모유 수유에 대한 배려 환경. 레스토랑에서 젖을 물리다가 화장실로 내몰렸다는 데서 보듯 모유가 엄마와 아이에게 좋다는 관심 환기 이전에 엄마젖을 마음대로 먹일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 구비가 급선무다.
아, 네 번째. 소저너 트루스를 잊을 뻔했다. 19세기 미국 실존인물인 그녀의 젖가슴은 그야말로 자존심과 용기의 심벌이다. 흑인 아들을 찾아 헤매던 트루스는 그녀를 남자라며 희롱하는 사내들에게 묻는다. 젖을 내놓고. “댁들도 내 젖 먹고 싶으세요?”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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