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형권 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
이러한 언어 사용법이 하나의 특수한 사례에 불과하다면 요즈음 청소년들의 구미를 맞추기 위한 장난이나 애교쯤으로 보아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유행가에서 애용되는 이러한 어법은 하나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거의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최근에 발간된 가요집(최신가요 대백과, 아름출판사, 2008년 5월 29일)을 살펴보니 약 4분의 1 가량이 이러한 가사를 사용하고 있다. 국주영종(國主英從)의 표기법을 넘어 때로는 한글 가사가 종속적인 역할에 그치고 오히려 영어 가사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들이 많다. 문제는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의 노래가 이른바 히트곡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국어의 심각한 오염은 노랫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연예인들의 예명, 광고 문구, 간판이나 상품 이름, 방송 언어 등 사회 곳곳에서 외국어가 남발, 오용되고 있다. 예컨대 연예인들의 예명을 보면 도대체 한국 사람인지 외국 사람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제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국외 활동을 왕성하게 할수록 한국적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진정한 문화인의 자세일 것이다. 이를테면 동남아에 불고 있는 한류 열풍을 떠올려 보자. 한류 스타들이 국적 불명의 외국어 이름과 한국 고유의 이름 가운데 어느 것을 사용하는 것이 호소력을 발휘할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한류의 근원은 한국 문화, 혹은 한국의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것이니 당연히 한국적인 이름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류는 가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모국어 오염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우선 이러한 가사를 대하는 일반 사람들이 거의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 듯하다. 오히려 이와 같은 국적불명의 언어 사용이 오히려 세련되고 신선하고 젊은 감각의 언어로 수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이러한 언어 현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사실이다. 모국어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나 문화 비평가들, 혹은 언론인들 가운데 이러한 언어 용법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도대체 그 많던 문화 애국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결코 국수주의자가 아니다. 협소한 국토에 인구 밀도가 높고 지하자원도 넉넉하지 못한 우리나라가 살 길은 국제화, 세계화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문화적인 자기정체성을 저버린 국제화, 세계화는 사대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을 발굴하여 그것을 세계의 보편적 문화로 발전시켜 가는 일이 선진 문화인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이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말한 대로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따라서 진정한 국제화, 세계화는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발굴하여 세계 문화로서의 가치를 고양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모국어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