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책읽기]생의 말년에 얻은 무욕·달관의 철학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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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책읽기]생의 말년에 얻은 무욕·달관의 철학 노래

박경리 유고시집 비소설 베스트… 39편 주옥같은 시 담아

  • 승인 2008-08-26 00:00
  • 신문게재 2008-08-27 11면
  • 김필수 대훈서적 기획실장김필수 대훈서적 기획실장
요즘 비소설 부문 베스트를 보면 10여년동안 류시화의 시를 제외하면 시를 베스트 순위에서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국내 최고의 여류작가가 타계하면서 그 분의 유고시집이 베스트에 올라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정말 오랜만의 반가운 일이다. 바로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가 그 책이다.

고 박경리씨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1946년 김행도씨와 중매 결혼해 1남1녀를 얻었지만, 전쟁 중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 남편은 6.25 나던 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이감되던 중 행방불명됐다.

"공산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용공으로 몰려 사라졌다."라고 생전에 박씨는 짧게 언급한 뒤 말을 아꼈다. 홀로 키운 딸(김영주)은 70년대 초 김지하 시인과 결혼했고, 박씨는 사위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르는 동안 딸의 가족 뒷바라지를 하면서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1955년 김동리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박씨는 <김약국의 딸들(1962)> <시장과 전장(1964)> 등의 장편 소설과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단편 <불신 시대> 등을 잇달아 발표했고, 마침내 박씨의 문학 세계는 대하 소설 <토지>라는 거대한 강물에 이른다.

박씨는 1969년 월간 현대문학 9월호에 연재를 시작해 무려 25년 동안 여러 매체로 연재 지면을 옮기면서 200자 원고지 4만여 장에 걸쳐 한국문학사의 큰 산맥으로 남을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했다.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도 하기 전에----'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경남 하동군 평사리에서 출발해 한반도와 만주 간도까지 펼쳐진 광활한 무대를 오가면서 8.15 광복을 맞기까지 격변기를 헤쳐나간 한민족의 생명력을 형상화하였다. 여주인공 최서희가 광복을 맞는 순간과 함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이 소설의 제5부 '끝'자는 공교롭게도 1994년 8월 15일 새벽 2시에 나왔다.

<토지> 집필 초기에 작가는 유방암 판정을 받아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밤새워 원고지를 메웠다. 작가의 한 맺힌 삶이 그처럼 독하게 글을 쓰게 밀어붙였다. "내가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데뷔 직후 밝혔던 박경리씨는 "아이 데리고 부모 모시고 혼자 벌어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불행에서 탈출하려는 소망 때문에 글을 썼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토지>는 TV 드라마로 세 차례나 제작되었고, 그때마다 높은 시청률을 올렸을 정도로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에 부합하는 서사의 힘을 발휘한 소설이기도 하다.

박경리씨는 타계하기 직전 신작시 <옛날의 그 집>을 발표하면서 생의 말년에 얻은 무욕(無欲)과 달관의 철학을 홀가분하게 노래했다. 시 <옛날의 그 집>은 1994년 8월 15일 박씨가 대하소설 <토지>를 탈고한 강원도 원주의 단구동 집(현재 토지 문학공원)을 가리킨다.

고 박경리 선생님의 딸이 쓴 서문에 고인을 기리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어머니가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고 남아있는 모든 기운을 사르면서 암기신 39편의 시를 모아 책으로 묶었습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가다듬고 가다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읽어가면서 슬프고 또 슬펐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수백장의 파지를 내시면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켰는데, 이 시들은 그다지 고치시지도 않고 물 흐르듯 써 내셨습니다. 언제나 당신에게 엄격하셨으며 가장 자유인이기를 소망이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여기 마지막 노래로 남았습니다.‘

-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 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 오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이제 님은 떠났지만 님이 남긴 발자취는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어 어둠을 밝게 비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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