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창현 한국한의학연구원 선임연구원.한의사 |
조선시대 최고 침구(鍼灸) 전문 어의였던 허임의 저서 ‘침구경험방’의 기록이다. 허임은 조선시대 선조와 광해군 때의 명의로 이름을 날린 불세출의 침구의사다. 당시 어의로 유명했던 허준과 함께 지금까지도 독보적인 침구 의사로 기록되고 있다. 침구경험방에는 간단한 침 시술에서부터 침으로 목숨을 건진 생생한 사례들이 수두룩하게 기록돼 있다.
올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한 우리나라 대표 의서 동의보감에도 당시의 다양한 침구치료 기록들은 셀 수 없이 많다. 동의보감이나 침구경험방 등 많이 알려진 국보급 의서 이외에도 우리나라에는 탁월한 효과가 있는 전국 각지의 침법들이 대대로 전수돼 왔다.
침법도 이웃 중국과는 개념이 달리 발전했다. 중국의 침법이 아픈 부위에 직접 침을 놓는 방식이라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팔다리의 경혈 위치에 침을 놓는 등 침구치료방법이 크게 차이가 났다. 당연히 각종 의학 서적에서 볼 수 있듯이 효과도 다르다.
이렇듯 우리나라만의 침법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침법을 포함한 한의학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침체기에 들어서게 된다. 대대로 전수되어오던 다양한 침법들이 소리없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 부터이다.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한 서양의학 우대 정책과 한의학에 대한 의도적인 폄하 정책은 침구를 포함한 한의학이 민간요법 정도로 인식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왜곡된 인식은 지금까지도 우리 주변에서 광범하게 인식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침은 이런 광범한 인식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 국립보건원(NIH)과 수많은 서양의 학자들도 인정한 치료기술이다. 서양의 많은 나라에서 침구치료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거나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수많은 논문이 이를 증명한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봉침이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고 있기도 하다.
한의학연구원이 국가의 지원을 받아 침구기술조사를 벌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반세기 맥이 끊긴 우리나라의 다양한 침구기술을 수집하여 이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지금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침구기술들이 민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잇다. 한의학연이 지난 3년여 동안 조사를 벌인 결과 이미 전국에 흩어져 있는 40여개의 침구기술을 수집한 바 있다.
젓가락만한 침으로 전신을 치료하는 조선대침에서부터 거머리를 이용한 거머리요법, 시력이 좋아지는 눈침, 수술 칼을 이용한 소침도 요법, 큰 뜸으로 치료하는 마야구, 독특한 재료를 이용하는 한서자기요법 등 종류도 다양하다.
한국한의학연구원은 이를 모두 DB화해서 연구를 해 나갈 계획이다. 국내 수집 작업이 진행되면 앞으로 해외로 범위를 확대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를 통해 침구치료기술을 발전시켜 국민보건의료 증진에도 기여할 것이다.
한의학의 융성기라고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이후 국가가 나서 이런 정도로 역사적인 원류를 찾기 위해 수집 작업을 벌이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한의학의 융성기인 의방유치나 동의보감 편찬 시기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한의계 발전의 의미있는 연구임은 틀림없다. 한국침법 수집연구는 누가 뭐래도 국민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한 국가적인 거대 의학 프로젝트이다. 막바지 더위가 한창인 요즈음 ‘溫故知新(온고지신)’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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