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인 충남대 교수 |
그러나 한 면만 본다든지 한 곳에 몰입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위험천만한 일이다. 세계적인 스포츠 행사가 있을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마치 그 행사가 세상의 전부이고, 삶의 전부인양 유도해서도 안 되고, 호도되어서도 아니 된다. 현실과의 단절이란 애당초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느끼는 느낌 몇 가지를 나누어 보자.
우선, 그동안 우리는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빛’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어왔다. 그래서 과거의 경우 은메달을 따고도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건 잘못이었다. 세계 2등이거나 3등이거나 얼마나 대단한 이룸이고 성과인가. 마침 이번 대회에서는 선수나 국민들이 메달의 색깔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메달 외의 등위라든지, 끝까지 바벨을 놓을 수 없었던 역도선수의 투혼, 여자하키선수들의 단 1승에 대하여도 칭찬과 격려, 위로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이것은 ‘그림자’도 함께 아우르려는 징후로 읽힌다. 다만 어떤 중계방송 캐스터나 해설자들은 “지난 대회 은메달의 한을 풀라”고 주문하면서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여전히 ‘빛’에만 집착했다.
승승장구하는 여자 핸드볼 경기에 온 국민이 열광하고 있다. 그러나 ‘우생순’의 승리를 기뻐하다가도 서른일곱 살의 골키퍼라든지 평균 연령 삼십대 중반이라는 해설을 들으면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는 핸드볼 승리라는 ‘빛’에 취하여 후진 양성이라든지, 선수들에 대한 처우라든지, 평소의 관심이라는 ‘그늘’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추운 구기종목이라고 비아냥거리며 ‘한 데 볼’이라고 조소했을까. 어둠에서, 그늘에서 빛이 나옴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른바 비인기종목들의 경우에는 더 심하다. 누구도 앞장서서 그들 종목에 드리운 그늘과 어둠을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얻는 ‘10-10’의 꿈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모름지기 빛은 그늘과 그림자를 동반하는 법이다. 밝음은 어둠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선수들의 선전이라든지 아름다운 몸놀림이 빛이라면 그것은 수년간의 훈련 중에 흘린 피와 땀이라는 그늘의 산물이다. 또한 중국이 세계를 향하여 선언하는 ‘중화의 부흥’ 뒤에는 사회계층간의 격차와 민족문제, 독립문제 등과 같은 짙은 어둠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TV에 눈과 귀를 뺏기는 동안 혹시 그늘이 주변을 덮지 않을까 경계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라. 올림픽 경기의 함성으로 열광하던 바로 그 기간에 지구의 저 편에서는 참혹한 전쟁이 있었고, 개최지 중국 내부에서는 독립을 꿈꾸는 테러도 있었다. 시선을 국내로 돌리면 KBS 정연주 사장의 구속수사와 MBC의 ‘PD수첩’ 관련 사과, 광복절에 즈음한 ‘건국절’ 논란, 무자비한 ‘촛불’진압, 그리고 친기업정책과 부동산경기 부양책이 진행되거나 계획되었다.
일부러 외면하지 않고 직시한다면 문제의 본질은 훨씬 심각하고 더 절박함을 알 것이다. 4년마다 열리는 휘황한 잔치에, 메달 몇 개로 우리가 세계의 선두그룹인양 우쭐하는 환각에 대부분 몸과 마음을 다 빼앗겼을 때, 스산한 파시즘적 망령이 어둠을 둘러치고 있다. WTA 밀어붙이기와 신공안정국, 해금과 사면, 청와대 벙커 국무회의, 시장원리와 무한경쟁, 등...
시간의 바퀴는 말없이 굴러 이제 주술이 풀릴 때가 다가온다. 환희와 열광과 도취의 무대에 막이 내리면......? 조명이 꺼진 뒤 주변은 더 어두울 수 있다. 환호의 열기가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고 느끼는 순간 당면한 현실이 더 추울 수도 있다. 망각할 수 없는 현실이 도저한 아픔으로 짓누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때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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