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산 조평휘 선생(78)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들이다.
대전지역의 한국화 분야에서 조평휘 선생의 역할과 공을 빼놓고는 지역의 한국화를 논할 수 없다.
중앙 화단 활동을 접고 지역에서 활동한 덕분에 ‘은둔 작가’라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지역 입장에서는 대전으로 은둔해 준 조 선생이 감사할 따름이다.
북한 황해도 연안 출신인 조평휘 선생은 6.25 전쟁 직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회화과에 입학했다.
“1.4 후퇴 때 피난을 왔는데 옷이 헤어지니까 벨트 하나만 남더라구.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덕분에 청전 이상범 교수를 독선생으로 모시고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조평휘 선생은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겸하고 있어 학업에 열중 할 수 없었다.
조 선생이 학교를 결석하는 날에는 청전 선생도 허탕치고 돌아가고, 모델도 허탕치고 돌아가는 일이 빈번했다.
그는 “그때 당시 청전 선생은 국전도 좌지우지했을만큼 미술계 권력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학업에만 열중하고,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배웠더라면 지금보다 유명인사가 됐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조 선생은 졸업 당시 미술계 흐름이었던 추상화를 시도했었다.
지루하고 오래된 전통 산수보다는 추상적인 작품의 매력에 이끌려 무려 10년여간을 외도했던 것.
뭔가 다른 추상작품을 하려고 했지만 어짜피 틀에 가둬지는 4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에 회의감을 가졌던 조 선생은 1974년경 먹던 ‘솔잎’을 먹기 위해 전통 산수화로 돌아온다.
그로부터 2년뒤 대전의 목원대학교에서 미술대 전임강사 제의가 들어왔다.
주변인들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작가가 되려면 서울에서 버티고, 교육자가 되려면 내려가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조 선생은 당당하게 말한다. 교육자가 되기 위해 내려왔다고..
덕분에 조평휘 교수의 지도를 받은 미술학도들이 대전의 동양화 맥을 이어가고 있을 정도다.
조평휘 선생의 작업실에는 60여권에 이르는 스크랩 북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화보집이 귀했던 대학생 시절의 버릇이 80에 이른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병원에서 잡지를 보다가 맘에 드는 산수 사진이 있다면 여지없이 양해를 구하고 찢어오는 습관이 있다.
스크랩 속의 풍경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예술은 감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 선생은 “예술은 감동을 줄 때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조형적 작업을 통해 감동이 될 수 있는 예술가의 승화 작업이 필요하다”며 “풍경을 본대로 그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제자들과 자주 스케치 여행을 떠나 스케치 작품을 만들어 오지만,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옮겨지는 스케치는 거의 없는 편이다.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조선생은 책을 통해 스스로를 가꾸고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작업실 곳곳에 있는 수천 권의 책들이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다.
과거부터 미술의 흐름을 모두 알아야 하는 동양화 작가는 불행하다고 불평 하지만 조 선생은 끊임 없이 노력하고 끊임없이 열중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김민영 기자 minyeong@
조평휘 선생 약력(아호 운산(雲山))
1932 황해도 연안읍 출생
1960 홍익대학 미술학부 회화과 졸업
1963~2000 신수회(新樹會)전 (1회 - 40회)
1977~1999 개인전 7회 ('77,'78,'81,'87,'93, 94, 99,)
1977~2000 목원대학교 교수 작품전 (3회 - 26회)
1982~1999 충청남도 초대작가전
1983~1986 한국미협이사(동양화분과위원장)
1984~1989 신묵회(新墨會)전(1회 - 6회)
1989~2000 대전광역시 미술대전 초대작가전 (1회 - 12회)
1994, 1995 목원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1999 국민훈장 동백장
현재 : 한국미술협회 고문 / 목원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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