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용색색의 만국기가 하늘을 도배하고 마을 사람 모두가 학교로 향하는 운동회 날 소년은 마을 잔치를 뒤로 하고 산을 올랐다.
다리가 불편해 제대로 걷기 못했던 소년은 신발을 양손에 끼고 온몸으로 기어서 마을 뒷산에 올라 만국기와 함성 소리로 뒤 덮인 운동장을 바라만 봤다.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어둠이 내리고 마을의 웃음 소리가 잦아들면 소년은 다시 기어서 산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 잔치인 운동회에 참여할 수 없는 자신의 신체 조건으로 인한 슬픔을 속으로 삭이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보들레의 시를 읽었다.`
쓰린 겨드랑이 밑을 지탱하는 목발에 의지해 살아온 소년을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시인이 돼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아픔을 시로 풀어냈다.
박재홍 시인의 `섬진 이야기`.
왜 하필 섬진강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풀어냈을까? 답은 간단했다. 가난에 더해 혼자만의 고통으로 인하 슬픔과 가족이 모두 섬진강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겪어야 했던 내면의 고통은 언뜻 볼 수 있을지언정 알 수 없는 일. 섬진강이 시인 박재홍 자신인 셈이다.
유년 시절 책을 읽으며 슬픔을 달랬던 시인 박재홍은 고등학교 3학년때 당시 내무부 주최 현상공모에서 산문부 최우수상을 받았다. 서른이 넘어 첫 시집 `낮달의 춤`을 발표하고는 10여 년간 말문이 막혀 자신이 시인이라는 것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지냈다. 이기간 서예를 배우고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시인이면서 서예가, 전각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다.
"이제는 세상에서 놀아 보고 싶다"는 그는 운동회가 열리는 날 운동장을 뒤로 하고 산꼭대기에 오르며 슬픔 속에 자신을 가뒀던 고독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자유로운 발걸음을 내 디뎠다.
박재홍 시인은 지체장애 2급으로 한국문인협회, 대전문인협회, 한국공간시인협회, 솟대문학회 등 문학단체의 회원이며, 한국미술협회 회원, 한빛 갤러리 대표. 대전광역시미술대전 초대작가,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작가, 동양서예학회 초대작가 등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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