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정미 한남대학교 정치언론국제학과 교수 |
주인공 잭바우어는 CTU(Counter Terrorist Unit), 말 그대로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대비하는 연방정부 기관의 요원이다. 잭바우어의 뒤에는 첨단의 정보기술, 컴퓨터 해킹, 국가보안자료, 감청자료, 위성사진, 교통사진 등 IT 와 관련된 모든 업무를 제공하는 동료들과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다. 잭 바우어는 애국을 내세운 무소불위의 살인기계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적을 고문하거나 약점을 이용하는 등 켤코 점잠빼지 않는다.
잭 바우어가 도저히 적에게서 정보를 빼낼 수 없을 때 협상카드로 쓰거나, 혹은 영리한 적이 잭에게 체포되었을 때 요구하는 댓가가 대통령의 사면권이다. 드라마이니 그렇겠지만 매회 적과 주인공의 긴장상태가 노정되고 그때마다 사면권이 남발된다. 때로 천신만고끝에 잡은 적이 무언가를 빌미로 대통령의 사면권을 받아 유유히 사라지기도 한다. 대통령의 사면권이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사면권의 용도는 본질과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번 광복절 특별사면은 34만 명을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사면이었다. 규모도 규모지만 대상자 면면이 문제이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명분하에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과 경제인이 대거 포함되었고, 청계천개발 댓가의 금품수수혐의로 형을 확정받은 받은 전 서울시 행정부시장도 포함되어 있다. 사실 사면·복권된 기업인들은 이미 법원으로부터 집행유예 이하의 관대한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특사로 인해 판결문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사면되었으니 유전무죄 운운하는 세간의 목소리가 새삼스럽지 않다.
더구나 이번 사면에서는 2001년 세무조사를 통해 조세 포탈이 드러난 족벌 신문사 사주와 경영인들이 대거 복권되었다. 23억여 원을 포탈하고 회사 돈 25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을 비롯해 김병건 전 동아일보 부사장, 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 송필호 중앙일보 대표이사 등이 그들이다.
더구나 그 시점이 지극히 노골적이다. KBS 정연주 사장을 해임시키고 배임혐의로 체포한 상황에서 엄청난 규모의 조세 포탈과 회사공금 횡령을 저지른 언론사 사주들을 한꺼번에 복권시킨 것이다. 이들이 경영하고 있는 신문사들은 하나 같이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측면 지원하거나 최근 촛불정국에서 현 정부에 우호적인 논조의 보도를 한 바 있다. 방송과 신문, 명실공히 언론장악의 수순을 밝고 국회와 거대여당까지 무력화시키는 전횡적인 정부가 구축되고 있다.
기실 대통령의 사면권은 지금까지 순수하게 사용되지 않았다. 역대 정부 역시 전 정권 인사, 경제인은 물론이고 불법과 비리를 저지른 자신의 측근을 구하는 방편으로 사면권을 이용해왔고, 이 때문에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는 늘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돼 왔다. 그러나 그런 역대 사면 중에서도 이번 광복절 특사는 염치불구의 사면이다. 수사와 재판 결과를 일거에 쓸어버리고 법질서를 무화시키고 있지 않은가.
사면은 헌법이 보장하는 고도의 통치행위다. 법치주의의 예외인 만큼 사면 대상은 분명한 명분과 기준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 사면권이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 해도 법치주의를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된다. 이건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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