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은, 배우가 무대를 위해 존재한다는 연기학 개론의 기술과 유사한 모범답안이다. 자기 몸에 점유권만 가질 뿐 소유권은 없다는, 배우의 존재 가치에 대한 100% 배우다운 해명 같기도 하다. 그건 그런데 문제는 배우도 아니면서 철저히 남의 시선을 즐기려는 광대적 사고를 가진 일반인들이다.
성형외과에서는 이들을 겨냥해 ‘몸짱수술’도 서슴지 않는다. 배에 식스팩, 즉 王자 물결을 새기거나 가슴 근육을 M자로 살리거나 등이나 팔 근육 부풀리기도 가능하다. 사람 근육이 쇠고기처럼 부위별로 취급받는 시대가 도래했다.
근 30년 전의 자랑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은 자화상이려니 여겨줬으면 한다. 가수 나훈아처럼 옷 벗고 5분간 보여준다 할 수도 없고 보여봤댔자 1% 남은 근육은 퇴화한 흔적기관인 양 희미하지만 지나간 한 시절, 조각 같은 몸매라는 상찬을 들었다는 진실만은 믿어도 좋다.
그때의 경험으로 말하면 이렇다. 올림픽 출전 선수의 목적이 건강이 아닌 것처럼 헬스클럽에서의 고된 중량운동은 ‘헬스’와 거리가 멀었다. 그 옛날 갤리선(船)을 노 젓던 노예들의 중노동에 가깝다 할 것이다. 내 몸이 남의 시선에 값하기 위한 몸이라는 압박감에 빠질 때는 운동은 자신을 향한 폭력이 된다.
몸이 설령 유행의 일부라 해도 몸 숭배의 집단정신에 사로잡혀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면 인생만 고달파진다. 병든 사과를 아팠다 하지 않듯이 아프지 않아도 병든 것은 병든 것이다. 신체 사이즈가 또 그렇게 대단한 권능일 수 없다.
한은정도 자신의 몸을 부인하진 않았다. 밑줄 쫙 긋고 찬찬히 보면,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는 전제를 깔고 “관객들의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내 몸은 내 몸, 나의 것’이다. 몸매에 대한 아집과 섹시해야 한다는 검열을 버려야 몸과 마음에 이롭다. /최충식 논설위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