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백겸 시인. 대전충남작가회의회장 |
K선생님도 일찍이 아시다시피 제가 분위기는 좋아하지만 주량이 많지 않은 거 다 아시죠. 아침에 일어나니 속은 아편전쟁처럼 격렬하고 눈은 힘이 없어서 커튼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노을의 색깔이 고흐의 그림처럼 몽롱했습니다. 갑자기 피아노 독주가 들어보고 싶어서 시디를 틀고 영국조곡을 거의 일년만에 들어보았습니다.
이 곡은 백록담의 겨울호수처럼 담백하면서도 고산지대의 작은 나무와 고사목의 뿌리를 바라보는 듯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사막의 동굴에 사는 늙은 은자의 흔들리지 않는 마음같다고 할까요. 베토벤 피아노소나타처럼 격렬한 감정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femme fatal이 아니고 지혜로운 마음이 고요한 소나무 숲을 거니는 듯한 늙은 여자의 침묵이 있습니다. 음 하나하나는 호수의 마음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켰으나 소리 없이 저 세상으로 넘어가는 나뭇잎처럼 오래 오래 감정의 여운을 끌고 가지요.
교항곡이나 협주곡들의 화려한 악기의 배치를 좋아하는 분들은 이런 음악이 싱거울 겁니다. 몸에 힘이 없으니 욕망과 의욕이 자연스레 놓아지고 자리에 다시 누워 여름구름이 하늘을 질러가는 풍경을 빈 마음에 누워서 듣노라니 음 하나 하나의 빛깔마저 보일 듯하더군요.오디오를 좋아하는 매니아분과 이야기하다가 좋은 음악감상을 위해선 기계 업그레이드 보다 몸과 감정의 업그레이드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과음의 술 한잔도 이런 때는 도움이 되나 봅니다.
노자 『도덕경』에 ‘만물은 무에서 나오고 고요함은 모든 소리의 근본이다` 라는 취지의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소리 중독에 걸려 오디오와 음반을 찾아 헤매던 제 오디오 인생에 일갈을 하는 대목이라 한참을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色聲香味觸에 집착함은 無明의 근원이라는 부처의 말씀이 계시지만 중생들은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환상에서 환상으로 돌아다녀야 몸과 마음이 존재하는 것 같으니 불가의 표현대로 다 業障이겠지요.
정신의학자들은 카사노바의 일생을 케이스로 삼아 수백의 여자를 추구한 이유를 그의 호색하는 몸에 돌리지 않고 현실의 여자에게서는 마음속의 환상을 추구하지 못해 계속 여자를 바꾸고 또 실망하는 카사노바 환상의 불만족에 돌렸습니다. 오디오 광인들은 소리미인을 찾아 끊임없이 기기를 바꾸며 남이 가진 첩이 더 이쁘지 않나 해서 기회가 있다면 집에 처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하이파이 콘테스트가 있다 하면 만사 제치고 달려갑니다.
“음악은 비탄이요 춤은 난심이라.” 불경은 탐진치 三毒을 끊어 청정열반을 주장합니다. 모두 환상이라는 얘기이지요. 그러나 아직은 환상이 즐거운 중생이고요. 예술가들의 깊은 마음이 담긴 작품의 사랑과 고통을 통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盛夏이고 몸의 기운이 가라앉는 시기입니다. K선생님도 몸 건강하시고 좋은 작품으로 후배들의 눈과 귀를 환상으로 인도해서 즐겁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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