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과 관련돼 전해오는 것으로는 백제 법왕 1년 지명대사에 의한 북부수덕사 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설이 있으나 지명대사는 신라승이므로 북부수덕사 창건과는 관련이 없다.
동명으로 지명대사가 있는데 그는 백제 위덕왕(554~598)대의 인물로 미륵사 창건과 관련돼 삼국유사에 기록이 남아있어 이도 수덕사 창건과는 상관이 없다.
신라 문무왕 2년(662) 원효조사의 창건설과 백제말 숭제법사의 창건설도 있으나 이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수덕사 대웅전을 세운 연대는 상량문에서 명확하게 밝혀지고 있다.
지난 1937년 수덕사 대웅전 수리 공사를 할 때 발견된 화반 하단에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대웅전은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건립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수덕사의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개 백제후기나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528년(중종 23)에 단청보수, 1751년(영조 27)과 1770년(영조 46). 1937년에 각각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덕사는 덕숭산 남쪽 구릉을 몇 단으로 정지하고 남향으로 불전을 배치했다.
이 가운데 중정을 두고 남쪽에 선방과 북쪽에 구릉을 배경으로 대웅전을 배치했으며 중정의 좌우측에는 각각 요사채를 두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으로 대웅이란 말의 뜻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으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컫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주존불인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와 보현의 두 보살을 봉안한다.
수덕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정갈하게 다듬어 만든 장대석으로 높은 기단을 만들고, 덤벙주초를 사용했다.
초석 중 몇 개는 기둥이 놓일 주좌를 새겨두기도 했다. 원주에는 배흘림기법이 명확하게 표현돼 있다.
기둥의 배열은 내부에 4개의 고주를 앞뒤로 2개씩 세우고 전 후면 옆은 툇간이 되도록 외진주를 세웠다.
기둥상부에는 창방을 걸고 기둥 직상부에만 공포를 짜 올린 주심포식 건물이다.
공포 구조는 기둥머리에 헛첨차를 끼워 주두를 놓은 다음 툇보 뺄목인 2제공과 출목첨차를 올리고 외목도리를 걸었다.
창방위에 평방은 생략됐고 주두와 소로 굽에는 약한 곡선과 굽받침이 있다.
첨차의 하단부는 연꽃주변의 곡선을 응용한 연화두식 초각을 새겼는데 이러한 특징은 고려시대 목조건축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기법이다.
귓기둥의 키를 조금 높여 마든 귓솟음이 적용돼 있는 것도 명확하게 표현돼 있다.
툇보 위와 대들보 위에 화려한 복화반을 놓고 그 위에 포대공을 설치해 중도리와 종도리를 받치도록 했다.
종량 위의 포대공 좌우로는 ‘人`모양의 솟을 합장을 설치해 구조적인 안정성을 강조했으며 특히 보 상부에 걸친 우미량은 구조적 완벽성과 함께 장식적 의도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이러한 목구조는 완벽한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건축기법으로 건축이라기보다는 마치 공예품과 같다.
같은 고려말기에 건립된 부석사 무량수전과 비교해 볼 때 영남지방의 직선적인 구조미와는 달리 곡선미를 지니고 있다.
비록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시대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백제의 기술적 토양 위에 만들어진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건립연대가 명확해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재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