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를 가지고 서로 통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놈`이 많다…. 지금 말하려는 놈이 분명 그 ‘놈`이다.
직업명의 ‘놈 자(者)`가 마뜩찮은 것도 놈이 타락적 발달을 거친 국어국문학적인 이유에서다. ‘놈`에서 ‘사람`으로 훈을 고쳐도 찜찜하지만 각자 풀기 나름이다. ‘사` 자 직업이라도 풀면 뜻이 색다르다. 판.검사는 일만 생각하고 또 고려하라고 일 사(事)를 쓰고,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도움 주고 의젓하게 살라고 선비 사(士)를 쓰며, 의사는 인간의 소중한 생명을 다루니 스승 사(師)를 쓴다.
‘사`가 다분히 선택적이라면 ‘놈`은 사해동포를 지칭하는 평등어다. 치과의사가 싫어하는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겠다`는 놈, 한의사가 싫어하는 ‘밥이 보약`이라는 놈, 변호사가 싫어하는 ‘법 없이 산다`는 놈, 목사가 싫어하는 ‘나만 믿고 내 뜻대로 살겠다`는 놈도 같은 놈이다. 둘러보면 이놈 그놈 저놈이 죄다 나쁜 놈 같지만 예쁘고 괜찮은 놈도 섞여 사는 사회다.
그렇게 가면 노동자는 노동인으로, 기자는 기인으로 바꾼다 할 판이다. 학자, 성직자, 현자, 선구자에도 놈이 붙었다. 과학자는 과학하는 놈, 현자는 어진 놈, 기자는 적는 놈이다. 자신을 낮춰 사회에 몸바치라고 놈 자를 썼겠지만 제 할 탓이다. 시선에 따라 천사 같은 놈이 극악한 놈이 된다. 산적이 사무라이를 죽이고 그 부인을 겁탈한 ‘라쇼몽`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산적의, 아내의, 무사의, 나무꾼의 시선이 현격하게 다른 것처럼.
한국판 서부영화 속의 세 놈 그 누구도 역시 똑 떨어지게 좋거나 나쁘거나 이상하지 않다. 뛰어난 판단력으로도 구분이 무용할 다양한 놈들이 하늘 아래 산다. 자신의 안목이 진실의 전부라고 믿는 이상한 놈, 좋다-나쁘다 이분법으로 종잡을 수 없이 애매한 놈도 있다. 놈놈놈. 임진왜란 전, 그 후에도 놈은 두루 만백성을 가리켰고, 생각하니 오늘도 사실상 그래서 써본 말이다. 세종대왕께서 너그러이 이해하실 거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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