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는 도구부터 우선 범상치가 않다. 수저받침 위의 수저는 사이좋게 누운 부부 형상 같다. ‘밥’은 모든 음식의 대명사다. ‘밥값’은 먹은 만큼, 받은 만큼의 대가이며, ‘밥맛’은 먹고 싶은 욕망, 어쩌면 살고 싶은 욕망 자체다.
토지박물관에서 본 옛날 밥그릇이 인상깊었다. 고구려 밥그릇 1300g, 고려 밥그릇 1040g, 조선 밥그릇은 690g의 쌀이 담긴다(사진 속 우리집 밥공기는 350g). 고구려인이 동아시아를 호령한 원천이 밥심 아니었을까 넘겨짚어 본다. 물론 옛날에도 소식가가 있었고 다이어트가 있었다.
하나의 예가 조선시대 절식패명(節食牌銘)이다. ‘의젓한 너 천군(=몸의 주재자인 마음)이여! 입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 팻말의 글을 낭송하며 과식을 경계한 풍경을 그려 보라. 또 밥 한 그릇도 거절할 땐 단호했다. 동춘당 송준길이 말년에 대전에 살며 임금이 하사한 음식을 사양하는 사식물소(辭食物疏)가 있다. 관청 곡식을 축낼 수 없다는 간곡한 상소였다. 그 글엔 굶주리는 백성 얘기를 함께 곁들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제안한 ‘하루 두 끼 운동’은 소동파의 경우보다 좀 좀스럽다. 재산이 29만1000원이라는 그가 아침 겸 점심인 브런치(아점)를 즐기는지는 모르겠으나 좋지 않은 처방이다. 세 끼 중 두 끼 채식해서 지구를 살리자 한다면 명분이라도 나았겠다.
다이어트, 웰빙, 슬로 라이프 따위는 먼 나라 일로 신(新)보릿고개를 지나는 서민에게 세 끼는 사치스러운 식습관일 수도 있다. 북한 주민 3분의 2가 하루 두 끼 먹는 현실은 곧 비참함이다. 멀리 가지 말고, 우리 빈곤층 아동 20%가 두 끼밖에 못 먹는 것이 절약인가 말이다.
박정희 시절의 구호가 ‘두 끼 먹다가 세 끼 먹자’였다면, ‘경제난 해결 위해 두 끼만 먹자’라는 전직 대통령 훈수는 박물관에나 어울릴 처방이요, 국민이 죽을 먹나 밥을 먹나 무관한 이들의 가십성 한담으로 들린다. 다시 내가 정의한다. 정치란, 삼시세끼 잘 먹게 해주는 것이다. 식사(食事)는 세상사(世上事)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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