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의 사항〕
① 제시문의 문장을 그대로 쓰지 말 것.
② 전체 분량은 1600(±160)자 내외로 할 것.
③ 시간은 120분임.
(가)
그러나 명성에 대한 욕망이 당신을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만사가 얼마나 빨리 잊혀지는가를 생각하고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로의 무한한 시간의 혼돈과 칭찬의 허무함과 칭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변하기 쉽고 얼마나 공정하지 못하며, 또 그 칭찬이 전해지는 공간이 얼마나 좁은가를 생각하라.
그러면 마침내 마음의 평정을 찾을 것이다. 지구 전체가 하나의 점일진대, 그 속에 살고 있는 당신의 주거지는 얼마나 작은 한 구석인가? 그리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조잘 것 없으며, 그렇다고 당신을 칭찬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
그리하여 결국은 당신 자신의 작은 영지로 피신할 것을 잊지 말고 무엇보다도 마음을 혼란시키지 말며, 긴장하지 말고 또한 자유로워야 하며, 한 남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운명에 정해진 사람으로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당신 주위에서 당신의 주목을 끄는 것에 대하여는 다음의 두 가지를 생각하라.
첫째, 사물은 외부에 있고 고정된 것이므로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마음의 움직임은 오로지 마음속에 생각으로부터 일어난다. 둘째, 당신이 보고 있는 만물은 곧 변화하여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이러한 변화를 이미 얼마나 목격했는지를 항상 명심하라. 우주는 변화이며, 인생은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나)
모든 욕망은 진화의 손길로 다듬어졌다. 개체들의 생존과 종족의 유지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것들이 살아남은 것이다. 따라서 물욕을 억누르는 일은 힘만 들고 효과는 없다. 물욕의 본질을 바로 보고 그것과 타협하는 것이 순리다.
그리고 물욕이 크게 해로운 경우는 언뜻 생각하기보다는 훨씬 드물다. 돈은 대체로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해야 벌 수 있다. 비록 어느 사회에서나 나쁜 짓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일찍이 새뮤얼 존슨이 말한 것처럼 뭐니뭐니해도 돈을 버는 일에 매달릴 때 사람은 죄를 가장 적게 짓는다. 그리고 하이에크가 지적한 것처럼 사치는 물질적 풍요에 선행하는 현상이다.
사회와 문명은 욕망을, 그것이 성욕이든 물욕이든 공명심이든 버리라는 얘기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고 발전해 온 것이 아니다. 자식들은 자신보다 좀 낫게 살기를 바라면서 땀 흘려 돈을 번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고 발전해 온 것이다. 이제는 그런 선남선녀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돈을 벌게 하라. - 복거일, 「자연스러운 물욕」
(다)
농사가 한때는 신성한 예술이었음을 옛 시와 신화는 최소한 암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대형 농장과 대량 수확만을 목표로 삼은 나머지 성급하고 생각없이 농사를 짓고 있다. 농부로 하여금 자기 직업의 신성함을 표현하고, 또 그 직업의 거룩한 기원을 회상하도록 하는 축제나 행사나 의식이 전혀 없다. 이것은 가축 품평회나 소위 추수감사절이라는 것을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이다. 농부의 관심은 오직 눈앞의 이익과 때려먹는 잔치에만 있다. 그는 농업의 여신이나 대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고 지옥의 황금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탐욕과 이기심 때문에 그리고 토지를 재산으로 보거나 재산 획득의 주요 수단으로 보는 누구나 벗어나지 못하는 천한 습성 때문에 자연의 경관은 불구가 되고 농사일은 품위를 잃었으며, 농부는 그 누구보다도 비천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농부는 자연을 도둑으로만 알고 있다. 카토는 농사에서 생기는 이익이 그 무엇보다 성스럽고 정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로마의 대학자 바로에 의하면, 고대 로마인은 “대지를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하고 농업의 여신 케레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은 경건하고 유익한 삶을 살고 있으며 그들만이 사트르누스 왕족의 유일한 후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흔히 잊기 쉬운 것은, 태양은 인간의 경작지와 대초원과 삼림지대를 차별 없이 똑같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태양의 광선을 똑같이 반사하거나 흡수한다. 인간의 경작지는 태양이 매일 지나다니는 길에 내려다보는 멋진 풍경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태양의 눈에 이 지구는 두루두루 잘 가꾸어진 하나의 정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양의 빛과 열의 혜택을 이에 상응하는 믿음과 아량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내가 이 종자 콩들을 소중히 여겨 가을에 수확한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내가 그토록 오래 보살펴온 이 넓은 밭은 나를 진짜 경작자로 보지 않고 밭에 물을 주고 밭을 푸르게 만드는, 보다 친절한 자연의 어떤 힘을 더 따르는 것이다.
이 콩의 결실을 내가 다 거둬들이는 것은 아니다. 밀의 이삭이 농부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서는 안 되겠으며, 그 낟알만이 밀대가 생산하는 모든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농사가 실패하는 일이 있겠는가? 잡초들의 씨앗이 새들의 주식일진대, 잡초가 무성한 것도 실은 내가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밭농사가 잘되어 농부의 광을 가득 채우느냐 아니냐는 비교적 중요한 일이 아니다. 금년에 숲에 밤이 열릴 것인지 아닌지 다람쥐가 걱정을 않듯 참다운 농부는 걱정에서 벗어나 자기 밭의 생산물에 대한 독점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최초의 소출 뿐만 아니라 최종의 소출도 제물로 바칠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 것이다. - 헨리 데이빗 소로, 「월든」
[학생 답안]황은주 대전 호수돈여고 2학년
정신적 가치는 삶을 풍요롭게 한다
▲ 황은주 대전 호수돈여고 2학년 |
이렇듯 사람들은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각자가 정한 나름대로의 삶의 기준에 따라 어떤 이들은 재물과 명예 같은 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반면, 또 어떤 이들은 사랑과 봉사 같은 내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이렇게 보면 우리 인생에는 크게 두 가지 길이 있는 것 같다. 물질적 가치를 좇느냐, 정신적 가치를 좇느냐.
제시문 (나)에서 글쓴이는 물욕은 우리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억누르기보다는 순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식욕이 있음으로해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
적당한 식욕과 물욕, 성욕은 우리 삶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궁극적`가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살기 위해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생에서 눈에 보이는 것 외에 추구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자기 희생을 통해 느끼는 보람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가치들을 추구할 때에 사람은 아름다워 보인다.
제시문 (다)를 보면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 가치를 우위에 두는 삶의 자세가 드러나 있다. 당장 눈 앞에 콩이 얼마나 많이 쌓여 있는가를 재지 말자고 말한다. 모두 원래는 자연의 것이었으므로 생산물을 독차지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는 것이다.
당장은 좀 배가 고프고 속이 쓰릴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농부는 더 행복하게 농사를 지을 것 같다. 우리의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업가 A씨가 마침내 사업이 성공을 해서 그의 기업이 대기업이 되었다고 하자. 그 성취에 대한 기쁨도 잠시 그는 또 다시 더 큰 기업 더 큰 성공을 바랄 것이다.
인간의 물질적 욕망은 끝이 없어서 하나를 얻으면 더 큰 하나를 원하기 마련이다. 그가 큰 재산가가 될지언정 그는 완전히 행복해지지는 못할 것 같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의 사랑과 소소한 행복을 느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반면에, 자원봉사자 B씨는 비록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는 못하더라도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살며 마음 속 가득한 행복과 보람을 느낄 것이다. 날마다 샘솟는 기쁨과 감사로 그는 영혼까지도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톨스토이는 인간이 물질적인 것을 넘어 영적인 것, 즉 정신적 가치를 추구할 때에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빛난다고 했다. 내면에 충실한 삶은 영혼을 윤택하게 하고 죽음마저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말이다. 제시문 (가)에서 말하듯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모두 사라진다. 하지만 정신적 가치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가슴 속에 향기로 남곤 한다.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 속에 향기를 남기는 삶이 진정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출제의도·총평]박창연 대전 호수돈여고 교사
현대인 ‘물질적-정신적 가치’ 성찰 기회
탄탄한 문장.매끄러운 전개력 칭찬할만
▲ 박창연 대전 호수돈여고 교사 |
이 논제는 이러한 성찰에서 출발한다. 제시문들은 각각 조금씩 다른 관점에서 물질과 삶의 행복, 외적 조건과 내적 완성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다. 물론 물질적 조건을 모두 포기하거나 외면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인간도 결국은 물질이라는 외적 조건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물질적 존재일 테니까. 이 논제는 그런 고민을 담고 있다.
이 학생은 논제에 충실하면서도 매우 탄탄하고 안정적인 구조로 글을 쓰고 있다. 글의 기본 형태인 서론, 본론, 결론이 어색한 표현이 없이 아주 자연스러운 문장력을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어서 한 눈에 쏙 들어오면서도 논지가 분명하다.
정신적 가치를 우위에 두는 삶의 가치를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깊이 있게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학생은 서론에서 인생의 길을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논제를 던져놓고 시작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정신적 가치냐 물질적 가치냐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살 수가 없다.
이런 논제의 경우 이분법적인 사고로 글을 전개하기보다는 어느 한쪽의 가치를 우위에 둔다고 해도 지혜롭게 다른 한 쪽의 가치를 수용하고 조화시키느냐가 이번 논제의 핵심이다. 삶은 둘로 나누어 살 수 없으면서 글을 둘로 나누어 표현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모든 글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녹아있어야 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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