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제가 간혹 면도하다 실수로 손님 귀를 베거든요.” 손님이 흠칫 물러서자 주인이 덧붙인다. “안심하세요. 상처 한 건당 천 원씩 변상하지요. 저번 손님은 수만 원 벌었을 걸요.” 이발사의 설명은 납량특집 수준이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이발을 마쳤는가 싶어 허둥허둥 한숨 돌리려는 순간, 가운도 안 입은 웬 젊은이가 등장한다. 주인이 그 새파란 친구에게 이르는 섬뜩한 한마디. “처음 하는 면도, 잘못하다 네 손 벤다.”
과장 섞인 얘기지만, 현 집권층에서 위태한 면도사의 잔영을 보는 것 같다. 촛불은 그 총체적인 부실의 아이콘이다. 빈틈에 바람이 난다고 촛불도 처음 켜든 5월 2일에서 멀어지면서 매너리즘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럴 때 양쪽 다 잘못이라고 싸잡음으로써 비겁한 언어이기 쉬운 양비론(兩非論)은 서투른 면도사 못지않게 무섭다. 어쩔 수 없게 촛불엔 희망의 요소와 불안의 요소가 너울거린다.
대표적인 것이, 직접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진보의 눈과 좌파의 저항으로 모는 보수의 눈이다. 어찌 되었든 일이 꼬인 것은 그릇된 협상 태도와 대응능력 부재에서 야기됐고 뒤늦게 대통령은 국민 불안감 해소를 머리 숙여 다짐했다.
그래서 뭐가 달라졌나. 청와대와 대책회의 사이에 진실 공방만 지리멸렬할 뿐이다. 청와대는 약속시간에 방문한 촛불집회 측을 일개 행정관이 맞아 “민원 형식으로 접수하고 돌아가라”며 뻣뻣한 자세로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소통은 없고 소통[牛痛]만 있다더니, 고장난 전화통 같아 답답하다.
이 같은 쇠고집과 닭고집은 이명박 정부가 국민을 어떻게 상대하는지 아주 ‘비디오’로 보여주는 사례다.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질질 끌다 경질되기 전까지 총대 메는 사람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사제단과 목사님에 쇠고기 안 먹는 스님들까지 행렬에 가세했다. 부인하지 못할 것은 실패한 민주주의가 촛불을 낳고, 촛불이 대의민주주의 실패를 확인시켰다는 점이다.
참으로 명박한(기구하고 복이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바로 그 명박(命薄)함을 딛고 한 단계 진화해야 한다. 잔디가 훼손되니 원천봉쇄한다는 식, 국민을 전략상 개념으로 생각하고 제풀에 잠잠하길 기다리는 방식이라면 사태를 풀고 자시고 할 게 없다. 정세균 민주당 새 대표는 여·야·정 원탁회의를 제안했다. 원탁이든 식탁이든 촛불잔치를 끝낼 길은 터줘야 한다.
그리고 그 모티브는 먼저 제공한 쪽이 만드는 게 순리적이다. 먹을거리 안전성은 여전히 미제(未濟) 상태이고, 와중에 미국산 알목심과 알등심이 1등급 한우 3분의 1 값에 팔리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러니 아직은 촛불을 끌 때가 아니라고도 한다. 대전역광장을 메운 인파에서 그걸 읽었고 서울광장의 천막 철거 장면에서도 직접 봤다. 촛불집회로 얻은 것과 잃은 것은 선명하다.
군사독재 치하에서 듣기 싫은 레퍼토리 중 “경제가 어려우니…”가 있었다. 살다 보니 그 말도 때로 적실하게 옳았다. 촛불 탓은 아니나 누구나 실감하듯이 우리 경제환경이 비관적이리만치 나쁘다는 것. 무조건 아니, 조건부 휴전이라도 해야 할 처지라는 것.
물론 최소한의 할 일은 해야 한다. ‘뇌 송송 구멍 탁’을 믿는 최초의 촛불 여학생들에게 부조리함을 설득하는 것도 그 하나다. 그런 능력을 갖춘 대통령과 정부라야 국민이 신뢰감을 갖는다. 어제(8일) 청와대 식당 점심 메뉴로 미국산 쇠고기가 나왔다 해서 안전하다는 증거는 없다. 일부 기자가 안 먹었다 해서 안전하지 않다는 증거도 없다.
유야무야 덮어버리자는 게 아니다. 초보 이발사 칼날에 면상을 내맡긴 손님의 심정인 국민에게 정말 안전한 돌파구 마련을 확약하고, 촛불은 축제의 한 페이지로 남기면서 물대포 아닌 자발성으로 끄자는 것이다. 68일 전 촛불을 시작할 때 순수한 용기가 있었듯이 끝낼 때 똑바른 현실인식이 필요하다. 양비론이라도 감수하겠다. 촛불은 아깝고 국정도 너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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