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의 쇠고기협상에서 실용만 추구하고 창조가 빠졌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지난 1월 외신기자클럽에서 창조적 실용주의란 미래지향적 사고와 실천적 행동을 통해 낡은 구조의 틀을 바꾸는 대전환을 의미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야말로 인간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인 환경, 인권, 빈곤, 질병 등을 극복하기 위해 지금까지는 다른 국가의 발전경로를 답습하여 압축 성장해왔으나 앞으로는 세계와 함께 걸어야 하는 이정표를 세우고 창조적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모방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창조하고 개척해 나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창조적 실용주의가 추구하는 목표는 국내적으로 통합의 정치를 통해 국민들에게 경제적 만족감과 행복감을 안겨 주는 것이고, 국제적으로는 아시아와 세계로 시야를 넓혀 글로벌 코리아를 통해 안전한 한반도, 풍요로운 아시아, 정의로운 세계질서를 형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쇠고기협상에서 한미동맹의 조속한 복원과 FTA비준이라는 실용적 가치에 매달리다 정작 국민의 주권의식과 건강권 등 창조적 가치를 소홀히 다루고 말았다.
이런 맥락에서 앞으로 공직사회가 창조적 실용주의를 자칫 잘못 이해하여 실리만 추구하다 공적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
행정이 존재하는 이유는 공직가치를 통해 공공성과 공적가치를 창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행정은 최대의 서비스산업이다. 이 말은 일본의 작은 도시 이즈모를 국제적인 도시로 발돋움 시킨 이와쿠니 데쓴도 전시장의 말이다.
전통적으로 관료제는 고금동서를 떠나 시민 위에 군림해 왔다. 관료는 관료제의 유지를 위해 관료제에는 봉사한다.
그러나 시민에게는 까다로운 존재였다. 오히려 시민이 관료제에 봉사하도록 강요당해 왔다. 관료는 서비스를 통해 보람을 느끼기보다는 군림하는 데에서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영 딴판이 되었다.
행정기관의 민원실에 들어가면 공무원들이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다.
무엇이 그들을 달라지게 만든 것일까? 시민의 권력이 커졌기 때문일까? 시대의 패러다임이 변해서일까? 아니면 정부의 경영혁신노력이 낳은 결과일까? 아마도 이 모든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빚어진 산물이 아닐까 싶다.
특히 정부운영에 있어 기업가적인 경영마인드들이 스며들면서 빚어진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시민을 고객으로 여기고 기업들이 고객을 위해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처럼 외양은 닮아 가는 듯하다.
그러나 시민은 고객이 아니다. 기업이 고객을 대할 때는 돈 많은 사람에게, 기업에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 더 잘하게 되어 있다. 그게 고객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정부와 시민의 관계는 기업과 기업고객의 관계와는 다르다. 행정은 고객이 아니라 시민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공공서비스의 질을 개선하는 노력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정부가 고객의 이기적이거나 단기적인 이해관계에 먼저 혹은 배타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실패의 확률이 높다.
모든 권력의 원천인 시민은 고객과 달리 역사적 존재이므로 궁극적으로 미래지향적 가치 위에서 도덕적으로 판단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정부가 공공성을 지향하는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오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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