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죄인`은 일제하 우리 문인들의 대일 협력문제를 주요 내용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당대 지식인들의 정신적 면모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작품 서두에서 채만식은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작중화자를 통해 “그 동안까지는 단순히 나는 하여커나 죄인이거니 하여 면목 없는 마음, 반성하는 마음이 골똘 할뿐이더니…” 하고 자신의 친일 행위를 고백하며, 스스로를 ‘민족의 죄인`으로 자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해방 후 우리 사회가 직면한 최대의 민족적 과제가 민족정기의 확립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식민지 잔재에 대한 청산이 전제되어야 했다는 점에서 채만식이 스스로를 민족의 죄인으로 인정한 것은 올바른 역사의식, 현실인식의 소산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작품의 중반부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대일협력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저질러진 행위라는 묘한 상황논리를 내세워 자신을 변명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곧 속죄(혹은 참회)하려던 당초의 생각이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담론과정에서 바뀌어 자기합리화의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죄의 표식에 ‘농담`이 있을 수 없다는 순환논법이 개입되면서 ‘민족의 죄인` (곧 민족 앞에 존재하는 죄인, 민족이라는 실체로서 가치판단이 주어지고 이런 개념 하에서 죄인을 치죄할 당위성이 확보된 경우)은 일시에 ‘죄인의 민족`(곧 모두가 민족의 죄인이므로 아무도 죄인을 치죄할 수 없다는 역설적 논법)으로 동질화되어 가치 혼란에 빠져들고 만다. 이렇게 되면 ‘民族의 罪人`은 없고 오로지 ‘罪人의 民族`만이 남게 되며, 더 이상 속죄와 참회를 할 윤리적, 도덕적 기반이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작가가 민족의 죄인의식을 갖고 속죄의 글을 쓰면서도 실상 자기변명이나 해명에 머물고 말 경우, 그 작품의 내적 질서가 흔들리게 됨은 물론이려니와 삶의 진정성과 역사적 방향성을 드러낼 수 없는 관계로 민족 현실에 대한 서사적 응전력을 쟁취해 낼 수 없게 된다. 채만식은 해방공간의 정신사적 흐름을 꿰뚫을 수 있는 문제적 제재를 힘들게 포착해 냈음에도 모럴의 부재와 자기변명의 논리에 함몰된 나머지 참회를 통한 새로운 거듭남의 기회를 상실한 비극적인 작가로 기억될 뿐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연일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경제계의 비리와 부조리들, 죄를 짓고도 오히려 더 당당한 소피스트 같은 인간 군상,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오리무중의 정치판, 실체는 없이 꼬리에 꼬리만 물고 의혹만 증폭돼 가는 사건 그리고 소문들, 어느 것 하나 보다 진전되고 변화된 것들이 있는가? 그저 안타깝고 인간적 비애감만 늘어갈 뿐이다.
사람이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하여 이를 회개하고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는 신념과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개인의 신념보다는 집단의 질서에, 결단보다는 변명의 논리에 익숙해진 우리들이기에 그 허위성을 쉽게 떨쳐내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이제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어떻게 하면 인내하며 승리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깊은 성찰과 실천하는 자세가 잘 드러나 있는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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