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태준 연극연출가.배재대 공연영상학부 교수 |
그렇다.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년 동안 진정 우리네 삶의 가장 큰 화두는 ‘부자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TV 휴먼 다큐멘터리 ‘성공시대’를 보며 의지를 불태웠고, 기존의 쫀쫀한 복권들을 능가하는 울트라 수퍼 복권, 로또를 정착시켰다.
한편으로는 부도나고, 집 날리고, 정리해고 되어 눈물 콧물 흘리던 시절,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나라 살리겠다며 이집 저집 장롱 속에 꼬불쳐뒀던 금두꺼비까지 꺼내 모으던 시절을 지나, 바야흐로 주식과 펀드는 기본이요, 재테크는 상식인 세상을 이룩해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백성들인가. 역사상 과연 ‘부자 되기’를 한 시대의 슬로건으로 삼았던 나라와 민족이 우리 말고 또 있었던가? 여기까지는 나도 별다른 이의가 없다. 나도 없이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같은 시기에 회자됐던 또 다른 광고 카피의 내용을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불편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모 분유회사의 프리미엄급 분유 광고였는데, 듣자하니 소위 ‘있는’ 집 엄마들, 혹은 예의 부자를 꿈꾸었거나 스스로 부자 되기를 기정사실화한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 내용인즉 ‘우리 아이가 앞서 갔으면 좋겠어요!’… 나도 한때 광고업 주변을 맴돈 적이 있지만 순전히 광고의 전략과 효과만을 생각한다면, 분유광고로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왜냐하면 이 카피야말로 험난한 이 시대에 아이를 키우는 모든 부모의 마음을 아주 솔직하게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모두의 꿈이 부자인 사회, 우리의 아이들이 앞서 가기 위해 애쓰는 사회는 제발 안 왔으면 좋겠다. 이것이 소심한 아빠이자 학교 선생인 나의 소망이다. 부(富)와 프리미엄 급 인생에 대한 무모한 열망, 이것이 그동안 우리 사회를 얼마나 병들게 했던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염치없는 존재로 만들었던가. 나는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해 있는 구조적 병폐의 주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확신한다. 천박한 가치 중심으로 모든 존재의 의미들이 재편되는 사회, 이기심의 구현과 헌신적인 성공이 구분되지 않는 사회, 자고로 건전한 사상과 철학이 부재하는 곳은 늘 황폐하기 마련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가난한 배우의 삶을 시작한 나의 학생 K의 미니 홈피에는 러시아 연극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말을 인용한 다음의 글이 적혀 있다. “작은 배역은 없다, 오로지 작은 배우만 있을 뿐이다.” 이제 차분한 마음으로 생각해본다. 세상은 무대요, 우리 모두는 배우이다. 큰 배역은 없다. 오로지 큰 연기만 있을 뿐이다. 갈수록 혼란스러워지는 요즘, 큰 배역 그 자체가 아니라 진정 큰 연기를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시기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