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 대전괴정고 교사 |
‘아니다. 이제야 시작인걸’하며 투덜대면서도 방과후학교나 평생교육의 비중이 점차 확대되는 현실을 보며 자꾸 30년 전 초임지의 기억이 지워지질 않는다.
1979년에 학교를 갓 졸업하고 첫 발령을 받았다. 들어보지도 못한 충북 영동의 상촌중학교. 3호선 국도를 따라 옥천 영동 황간을 지나 비포장도로의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40리길을 들어간다. 면소재지라고 해봐야 보잘것없는 시골동네이지만 그래도 있을 것은 다 갖추었다. 면사무소, 지서, 약방, 의원, 그리고 자장면집까지 다 갖추었다.
알고 보니 왕년에는 이곳에 금광이 발달하여 돈푼깨나 흔들며, 주점의 웃음소리가 밤새도록 새어나와 흥청망청하던 시절도 있던 동네였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광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다 실직을 하고 이곳을 떠나거나, 아니면 보잘 것 없는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옛날의 영화를 회상하며 고작 막걸리 잔에 오늘의 가난을 한탄할 뿐, 커가는 자식들의 성화에 시름만 깊어가는 사람들이 많은 그런 마을이었다.
음악교사로 부임하여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과 인사를 나눈 후 난 비로소 선생님이 되었다.
합창반도 만들었다. 어머니 합창대도 만들었다. 이 동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할 수 있는 이는 나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학교에는 아이들이 수업시간마다 들어 나르는 오르간 한 대가 전부, 어디 노래할 공간도 교실이 아니면 아무 곳도 없다. 반주용 악기는 열심히 밟고 구르지 않으면 소리가 끊기는 고작 풍금 하나였다.
여러 모로 도심지의 학교에 비해 매우 열악하지만, 이제 처음 시작하는 교단인데 80리 먼 길 영동에 가 경연대회도 나가고 싶었다. 아이들도 덩달아 경연대회에 나가자고 싸리꽃 진달래 한 아름씩 꺾어와 내 책상을 메우고 자취방 꽃병까지 채우니, “에라 모르겠다 한번 해보자.”
“얘들아 오늘부터 학교 끝나면 우리 집으로 모여!” 하곤 자취방으로 가 집이 멀어 갔다 올 수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저녁을 해 먹었다.
아이들과 피아노를 밀어 방문 입구로 옮기고 나면 약속 시간 한참 전에 아이들은 다 모인다. 그러면 내 자취하는 집 마당은 금방 합창반이 자리를 메우고, 노랫소리가 동네에 퍼진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엄마들이 모이고 이젠 아이들이 끝나면 엄마들까지 노래하자 성화를 부린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을 제하면 밤마다 우리 자취집은 노래연습장이 되었다.
평생교육과 방과후 학교의 비중은 우리 교육과정 속에서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정책적인 지원도 30년 전을 생각하면 매우 파격적이다. 오늘도 학부모와 아이들을 위한 ‘기타반’을 방과후학교로 운영하며 교육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특히 진정한 방과후학교의 방향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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