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형권 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
최근 정부와 미국과의 쇠고기 수출입 협상이 타결되면서 타오르기 시작한 촛불 문화제의 열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기세가 누그러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외형적으로만 그런 것일 뿐 아직도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촛불이 꺼지지 않았다.
이쯤에서 우리는 촛불 문화제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쯤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보았다시피, 전국 각지에서 거행된 촛불 문화제의 열기는 우리 사회가 뿌리 깊이 간직해 온 민주적 역량을 한껏 발휘하는 한바탕 축제였다. 초등학교 어린이로부터 중고등학생, 대학생,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엄마의 손에까지 촛불은 어김없이 들려 있었다. 노래와 함께, 율동과 함께.
촛불 문화제는 전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문화사적 사건에 속한다. 수 천 수 만의 ‘혼자들’이 모인 촛불 문화제는 우리 사회가 창출해 낸 21세기형 문화 축제, 혹은 건전한 시위 문화의 새로운 모델이다. 21세기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의 특성인 중심 없는 다양성, 강요 없는 수평적 자발성의 패러다임이 한국적 사회 현실에 반영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깃발 아래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진 작위적 행위가 아니라, 개개인이 깃발이 되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혼자들’의 자연스런 행위였다. 바슐라르의 말을 빌리면, 이 촛불들은 “혼자 꿈꾸는 인간 자체의 모습”이며 “부조리를 일소하려는 의지”와 관련되는 것이다.
촛불 문화제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과 변화 욕구를 아래로부터 분출했다는 점에서 4·19혁명과 6·10항쟁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문제는 촛불 문화제에 대한 정치적 해석, 다시 말하면 당파적 해석이 지나치다는 점이다. 같은 행사를 두고 한쪽에서는 촛불 ‘축제’라고 명명하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촛불 ‘난동’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축제’와 ‘난동’의 차이는 무엇인가? ‘축제’와 ‘난동’은 같은 대상을 두고 사용하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먼 용어들이다. ‘축제’는 추수감사절이나 제사(祭祀) 의식에서 연원된 것이므로 경건하면서도 흥겨운 행사다. 그러나 ‘난동’은 말 그대로 자기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어지럽고 문란한 행동을 일컫는다.
‘쇠[鐵]의 고기(拷器)’가 아닌 ‘소의 고기’를 원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자. 촛불 문화제는 분명히 ‘난동’이 아니었다. 저 스스로 모인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고 거리 행진을 하면서 자신의 개인적 소망을 비는 일을 어떻게 ‘난동’이라 부를 수 있는가? 물론 촛불 문화제의 과정에서 극히 일부 참가자들이 도에 넘치는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행동은 촛불 문화제 참가자 대부분의 의사와는 무관한 순간적, 우발적인 것일 뿐이었다.
따라서 일부 참가자들의 비이성적 행동은 촛불 문화제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규정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촛불은 든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오직 국민의 몸과 마음을 고문하는 ‘쇠[鐵]의 고기(拷器)’를 물리치고 청결하고 안전한 ‘소의 고기’를 식탁에 올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촛불 문화제의 커다란 의미는 국민들의 정치적 욕구를 평화로운 문화적 축제의 장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참가자들은 순수하게 자신의 건강과 가족의 건강, 그리고 주권 국가 국민으로서의 자존심 회복을 소망했다. 중요한 것은 이 소망이 비단 소고기 문제에만 국한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촛불은 앞으로도 하나의 상징으로 남아 우리 사회의 비민주적 일방주의를 제어하는 기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하여 국민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촛불은 계속 살아 있다가 때로는 횃불처럼, 혹은 봉화처럼 타올라야 한다. 촛불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국민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대통령의 따뜻한 리더십을 이끌어 내야 하는 상징적 역할을 이미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