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재 국악칼럼니스트 |
가객(歌客)의 목소리와 율객(律客)이 연주하는 사죽(絲竹)의 울림이 느릿하게 어우러지면 듣는 이는 어느새 중화(中和)의 밭에서 소요(逍遙)하게 됩니다. 한편, 시조(時調)는 조선시대 영조 때 발생한 곡조(曲調)입니다. 가곡이 지극히 예술적이라면 시조는 꽤나 문학적이며 서정적 호소력이 뛰어납니다.
시조는 형식과 창법이 가곡에 비해 단순하고 자유로워 수없이 분열 성장합니다. 그 결과 그룹에 따라 그리고 지역에 따라 가락이나 시김새가 조금씩 다르지요. 정가 속의 또 다른 작은 장르인 가사(歌詞)는 조선 중기 이후에 발생한 노래로 추측됩니다. 시를 노랫말 삼아 부르는 가곡 · 시조와는 달리 장편의 비정형 사설을 노래 부릅니다.
민속악적 창법이 가미되어 있어 다소 화려한 느낌을 지니고 있지요. 정가에 작은 부문을 하나 더 보탠다면 대개 칠언(七言)으로 된 한시를 독특한 선율에 얹어 부르는 시창(詩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무심한 세월 속에서 몇 개의 화석화 된 가락만 남아있지만 말이지요.
그런데 정가(正歌)가 우리음악의 한 기둥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수신(修身)을 지향하는 음률이기에 상업적 잣대로 음악적 가치를 포폄(褒貶)하는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쉽게 드러낼 수가 없었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세의 변천 속에서 정가를 향유하던 계층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경쾌하고 분방해 보이는 외국음악이 쏟아져 들어오자 삶을 관조하는 듯 넉넉하고 느릿한 정가의 가락과 장단은 낡은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희로애락에 흠뻑 빠진 선율과 리듬은 내면의 소리를 외면하였지요.
번잡한 ‘소리-움직임`으로 가득 찬 현대의 발산음악은 경제적 이윤의 극대화만을 지상과제로 삼는 조급하고 편협해진 요즈음 우리의 품성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음악이란 모름지기 감정을 터뜨리는 요소와 오감을 통하여 얻어낸 에너지를 내적으로 승화하는 수렴적 요소의 조화태(調和態)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거의 지워진 정가의 길을 걷는 가객들의 결심은 높이 살 만합니다. 깨닫지는 못하고 있지만 기실은 우리 핏속에 녹아있는 정가를 우리 자신이 외면한다면 정가는 어떻게 될까요? 가객은 걷습니다. 스페인 시인 마차도(Machado)의 시(詩)처럼. “나그네여! 길은 걸어서 생기는 것이고/ 걷다 보면 길이 나는 게지.” 그런데 그 길은 서산대사 청허휴정의 시처럼 걸어야겠지요. “오늘 나의 자취는 내일 후손의 길일세”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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