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의병인가. 의병은 국가 위란 상황에 조정의 명이 없이 일어난 자발적인 백성의 군대다. 이렇다할 배후는 없었다. 삼국시대 안시성 싸움 등과 고려의 대몽 항쟁, 조선조 임병양란(壬丙兩亂) 의병, 구한말 항일 의병전쟁이 대개 그렇다.
의병이 국가를 위해서만 일어섰느냐. 창의(倡義) 동기에 나라와 임금을 위하는 근왕(勤王)을 표방은 했지만 그에 먼저 내 가족과 재산을 구하고자 했다. 나와 내 자녀의 건강을 염려해 처음 촛불을 든 것과 닮았다. 의병들이 내 고을, 내 농토의 영역을 좀체 넘지 않고 향토방위만 주로 전담했던 것도 그런 이유다. 나라를 위한 분연한 봉기라는 것은 집권층에 의한 상징조작 요소가 강하다.
그러면 촛불 시위 수혜자는? 청와대 뒷산에서 촛불 현장을 보며 민심을 깨달았을 대통령? 대미 협상이 꼬일 때면 “이게 과학적으로 설명되느냐”며 촛불시위 사진을 내밀었다는 통상교섭본부장? 아니, 온 국민이 수혜자여야 한다.
집권 세력의 필요에 따라 의병은 난민이 된다. 시위대가 “(공권력) 놀아줘”라며 비웃고, 폭력 양태로도 번지면 도적떼나 반란에 합류한 의병집단의 경우처럼 획득한 정당성까지 무력화된다.
보다 긍정하는 시선에서는 먹을거리 주권을 의제로 ‘촛불잔치`를 벌인 군중이 오히려 의병 같다. 화석화된 대의(代議) 민주주의, 공화주의 회복 내지 발견에 대한 평가는 유보하고라도 긍정의 평가가 압도적이다. 이런 가운데 이제 촛불을 끄자는 여론이 절반을 넘어섰다. 의병이 그랬듯이 촛불의 끝을 좌우하는 것 역시나 민심.
그 누가 ‘포르노`라 하건 말건, 구술문화를 주도하는 네티즌은 돗자리만 안 깔았지 소설가 피를 이었을시 분명하다. 돌고 돌아 백가쟁명(百家爭鳴), 골목골목 제자백가가 키 재기를 하는 시대에 소설가가 그 홀로 촛불을 끌까. 의병장을 자처하지 않겠다면 말이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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