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동 중문침례교회 목사 |
젊은 친구들이 하는 인터뷰에도 병든 소고기를 먹고 죽을까봐 반대를 하는 것은 다음의 문제라고 했다. 믿고 위탁한 정부가 절차를 선명하지 않게 그리고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고, 민주사회의 주인인 국민의 의견을 묵살하는 데에 대한 항거라고 했다.
필자가 그래도 기대하는 하고 기대고 싶은 것은 우리 기성세대가 직접 가르치지 않았더라도, 젊은이들이 이러한 눈을 뜨게 환경을 열어준 것은 부모와 선배들이 일군 희생의 피밭이며 인내라는 눈물의 씨앗과 말없이 뒷감당을 한 땀의 거름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염려되고 씁쓸함이 필자에게 밀물처럼 스며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법은 훌륭한 사회를 괜히 휘집어 감시하고 또 찾아내서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자연법이라는 인간의 고유의 양심의 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 피해를 최소로 줄이기 위한 것이 법의 존재 이유다. 경고하지 않더라도 엄포를 놓지 않더라도 ‘사람이 스스로 세운 법에 따라 자유로이 책임지며 행동하는 것` 그것이 참으로 자율이라 생각한다. 사이버네틱한 차가운 매체에 인간애의 뜨거운 심장이라는 펌프가 소외될 수는 없지 않은가?!
필자가 당부하고 기대하는 바는, 축제라는 이름이 그 목적과 역할을 하자면 일시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축제는 잔치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무리수보다는 재충전의 한시적 시간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지금의 책임감에 찬 외침은 평범한 삶을 지향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럼으로 스스로 세운 법에 자신을 세웠던 자율의 이름으로 모두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시간의 계획표도 만들어야만 한다. 특수임무라는 것도 결국은 일상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자율의 시위는 자율의 평범함과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한다. 정부도 자랑스런 민주 국민도 개인이 구성된 조국의 공동체를 위해 이제 땀 흘려 일해야만 한다.
어쩌면 필자가 말하는 세상은 홍길동의 율도국이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인지도 모를 일이다. 홍길동은 가상의 인물이니 그런 나라가 있는 것은 만무하고, 모어가 그리던 나라도 부정의 접두어 `U(not)`가 붙어 실제 존재하지 않다는 뜻이라니.
그럼에도 필자는 여전히 실망하지 않는다. 지금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도 두 가지의 자세가 열려 있으니 하나는 절망과 포기요, 또 하나는 소망과 구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지금은 가지지 않았기에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때 이루어질 이상을 꿈꿀 수 있다. 이만큼 좋은 것이 어디에 있나?! ‘어제와 오늘보다 더 새 것으로 내일에 준비되어 있다는 것` 참으로 황홀한 유토피아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기대하는 바가 있다. 성경에서 아담과 하와부부가 범죄 한 후 피해서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신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말은 그냥 그들이 있는 장소 이상을 물으시는 것이다. 무슨 이유로, 어떻게 해서, 무엇이 너를 이끌어 여기에 있는가를 물으시는 함축적인 질문이다.
지금 촛불문화제 속에서 그리고 그들을 제재해야하는 측에서 모두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지금 바로 여기에` 여러분이 있는데, 이유와 명분과 정체성이 그 고귀한 고유의 정신이라는 영혼이 여러분의 존재 이유와 함께 있는 지를. 촛불이 꺼질 정도로, 마스크를 벗어 던져 짓밟힐 정도로 제재해서도 뛰어서도 안되는 것 아닌가? 스스로 불어 버려도 또 외부로부터 꺼져서도 안되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촛불이리라. 진정 양자 모두가 긍정할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목회자로서 여러분 모두에게 박수를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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