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철 한남대교수(행정복지대학원장) |
그러나 의회를 중심으로 한 대의정치도 19세기 초반에 이르러 패거리별로 나누어진 정당정치의 형태로 다양한 의견수렴과 결집을 꾀했다. 국민과 통치자와의 관계는 아테네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정당과 의회라는 중간자들이 매개하는 간접적인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20세기 전반에 접어들면서 수많은 이익단체들이 생겨나게 됐고 이들을 통해 시민들의 이익이 정당정치 구조에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이익단체들이 끼어들면서 시민들과 통치자와의 관계는 또 다시 한단계 더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는 정당의 위기가 찾아왔다.
기존의 이념적인 대중정당들이나 보수적인 정당들은 노동자나 농민의 이익, 또는 특정 종교단체의 정책들, 기업의 이익들을 대변하였었으나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환경문제, 여성문제, 교육문제 등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는 데에 실패했다. 이러한 간극들을 헤집고 출현한 것이 시민단체들이다.
환경문제나 여성문제들은 특정 계층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전 국민의 문제였기 때문에 특정 계층이나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하였던 정당들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시민단체들은 이런 문제들을 대변하면서 기존의 정치적 장치인 정당정치구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시민들의 이러한 반란에 힘입어 요즘에는 시민과 정부가 함께 일을 논의하는 거버넌스(협치)가 유행할 정도로 통치과정에 대한 시민들의 목소리가 커져 왔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시민을 넘어서서 네티즌들이 거대한 혁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건강문제로 인해 촉발된 촛불시위는 다원주의적 정당정치로 표현되는 한국의 간접민주정치구조를 일거에 무력화시키는 쓰나미를 연출했다.
대대적인 촛불시위 동안 야당은 등원을 거부한 채 거리 시위에 동참했다. 언론지상에서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향후 21세기의 대변화 추세가 여론을 주도하였던 전통적인 지식인들의 몰락과 정당정치 구조의 와해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케 하는 사건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네티즌으로 표현되는 21세기적 시민과 통치자가 직접 연결되는 직접민주정치의 부활로 여겨질 수도 있는 현상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변화들이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으로 유도돼야 하는가? 네티즌들은 스스로 지식을 만들어가는 집단지성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전문적인 정치 조타수들인 정당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네티즌들이 국민의 소리를 표현하는 즉, ‘국민에 의한 정치’에는 적절한 대표집단 일수도 있지만 이것이 ‘국민을 위한 정치’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쇠고기 파동은 국민의 관심사를 신중하게 반영하지 않아서 생긴 것이지만 그 구체적인 최후의 처리방법까지 일반 국민이 규정하기에는 국제관계가 간단치가 않다. 국가 이익상 ‘좋은 외교정책’이 반드시 국민에게 ‘인기있는 외교정책’은 아니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 통치자는 최대한 인기있는 외교정책을 추구해야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양자의 격차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통치자가 가장 훌륭한 민주적 지도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치적 장치를 건설해야 한다. 앞으로 다른 이슈에 있어서도 여과되지 않는 네티즌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된다면 장기적으로 국가가 위기상태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민들의 뜻을 무시하는 통치자도 민주적 정치권력의 붕괴를 가져오기 때문에 위험하다. 따라서 한나라당에서 ‘네티즌 여론 사이드카’라는 제도적 장치를 검토하는 시도는 21세기의 이러한 변화 추세를 반영하는 새로운 정치적 장치라는 점에서 환영받을 수 있다. ‘좋은 정책’과 ‘인기있는 정책’의 괴리를 줄일 수 있는 21세기적 정치적 장치와 이에 걸맞는 대한민국 조타수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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