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율정 대전지방보훈청장 |
이런 전통이 확립되어서인지 서방 선진국 전투 부대의 지휘관들도 후방에서 지시하기보다는 최전선에서 직접 작전에 참여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사에 가장 비극적이었던 한국전쟁에 미국 등 우방 연합군이 참여하여 김일성 침략 세력을 물리쳤는데, 그 중 가장 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이곳 대전에서 윌리엄 딘 (William Dean) 소장이 북한군 15명과 백병전을 하다가 결국에는 포로가 되어 3년 만에 귀환한 일이다.
딘 소장은 1950년 7월 3일에 한국에 도착하여 대전에 그 본부를 두었다. 그의 주요 임무는 북한군의 침입을 최대한 늦추는 것이었다. 단순한 생각으로는 너무 소극적이 아니냐고 힐난할 수 있지만 적군에 비해 병력의 압도적 열세 등으로 전시상황이 그에게 불리한 입장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딘 소장은 추가 병력이 배치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이미 초기에 연대 병력이 무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오로지 수류탄 하나로 북한군 탱크를 격파한 공적을 세운 일도 있다.
결국, 1950년 7월 20일에 침략세력에 체포되어 3년 동안 혹독한 포로 생활을 겪어야 했다. 그는 극심한 고문에 혹시나 군 기밀을 누출할까 두려워 자살할 생각도 수도 없이했다. 그는 체포 당시에 곧 진행될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특급 비밀도 알고 있었지만 수많은 심문과 취조에도 끝까지 비밀을 발설하지 않은 용맹을 보였다.
이곳 대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딘 소장이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에도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중요한 군사 기밀을 지켰다는 사실은 최고의 보훈정신을 몸으로 직접 보인 것이다.
한국전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역전의 용사로서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적군의 포로가 되어 상상할 수 없는 고초에도 중요 기밀 등을 지켜낸 점이 인정되어 의회는 딘 장군이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명예 메달 (Medal of Honor) 수여를 결정했다.
“딘 소장은 복무 조건을 훨씬 초월하여 생명이 촌각을 다툴 수 있는 극도의 위급한 상황에서 뛰어난 용맹성을 보여 주었다. 딘 장군은 수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적군과 교전하면서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상황에서 결연히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생각했다. 대전이 마침내 함락되었을 때에도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끝까지 지휘관으로 남아 부상 장병을 안전한 장소로 옮겼다. 딘 장군이 작전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안위는 철저히 무시하고 오로지 부대원을 위한 용기 있는 헌신과 영웅적 지도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메달에 새겨진 딘 장군의 공적 사항을 보면 그가 어떤 화려한 언변보다 몸과 행동으로 보이는 나라사랑의 실천적 보훈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보훈정신으로 딘 소장이 보인 용맹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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