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억중 건축가, 한남대 교수 |
사유의 집짓기는 언어의 집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기초공사나 다름없다. 생각이 부실하면 집의 구조나 모양도 허술하기 마련이니, 언어의 집은 형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건축가에게 맡기더라도 사유의 집만큼은 건축주도 건축가와 함께 지어야 한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지 않는가? 잘 생기고 말 잘하고 글 잘 쓴들, 판단만큼 소중할까? 자칫 생각과 판단이 모자라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집이 아니라 사람을 억압하는 집이 되고 만다면 집을 지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사유의 집은 언어의 집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그 거울이 있어야 잘 지어 놓은 생각을 형태언어로 잘 표현하고 있는 지 스스로 성찰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집다운 집을 염원하려면 무엇보다도 사유의 집부터 잘 지어야 한다. 대지 위에 굳건하게 생각을 짓는 것 ! 그것이 건축의 기본이요 출발이어야 한다.
이처럼 ‘그 자리, 그런 집`을 지으려면 ‘사유의 집`에서 ‘언어의 집`을 끊임없이 오가며, 매순간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 지 고민하며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집도 아름다운 꽃처럼 활짝 피어날 수 있다. 피다만 꽃은 곧바로 시들어 추레한 것처럼 사유와 언어가 자연스럽게 한 몸을 이루지 못한 집이라면, 아물지 못한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 보기에도 민망하다.
이렇다 할 사유는 담고 있지 못한 채 그럴듯한 언어의 옷을 입고 있는 집이 그렇고, 현란한 사유는 있으되 적절한 언어로 다듬어지지 않은 집이 바로 그러하다. 그런 집은 자연스럽지 못하고 왠지 요란스럽고 거북하다. 사유와 언어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껍데기만 번지르름한 집이 되고 만다.
안으로부터 상처를 뚫고 꽃을 피우듯, 그 인고의 기다림 속에 사유에서 언어로 가는 과정이 있어야 집다운 집을 그려낼 수 있다. 그 속내의 상처가 절정에 다다라 밖으로 피어 오른 꽃을 보면, 무형의 사유가 침묵의 언어로 바뀌는 신비를 알 수 있다.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가 있듯, 깊은 사유와 영혼이 깃들어 있는 집도 내밀한 태생의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잴 수 없는 것에서 잴 수 있는 것으로의 진화. 보편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으로의 좁힘. 이(理)에서 기(氣)로의 발산.
잘 구축된 ‘사유의 집`은 형태와 공간이라는 ‘언어의 집‘을 빌어 그 형체를 밖으로 드러낸다. 언어의 집이란 결국 물리적인 구조물이므로 볼 수 있는 존재이며, 크기를 잴 수 있는 실재다. 언어의 집은 생각을 구체화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에 하나만을 선택한 것이므로 개별적인 세계요, 용해된 기(氣)의 세계다. 그렇다. 상처에서 꽃이 피기까지의 내밀한 순서! 그것이 바로 참다운 설계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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