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경동 중문침례교회 목사 |
필자는 지혜서를 접할 때마다 사랑하는 내나라 대한민국을 뜨겁게 가슴 속 깊이 끌어안게 된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만큼 더욱 성숙된 민족의식이 절박함을 깨달아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부르짖으며 기도하게 된다.
작금의 상황에 나라가 떠들썩하거나 뒤숭숭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민주주의는 무엇보다도 주인인 국민의 뜻 곧 민심(民心)이라는 의견이 고루 들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 문제로 마음을 같이한 사람들이 뜻을 모으고 집회를 열고 있다.
염려와는 달리 시위문화도 성숙한 정착을 향해 가는 모습을 어느 정도는 본다. 이번에도 상징으로 촛불을 들었다. 그 치부를 밝혀 지탄하고 처벌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보다는 전문직의 관료들이 이를 시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리라.
이들은 또한 마스크를 사용한다. 침묵을 말함일 게다. 언어란 소리와 문자가 있지만 그것을 넘어 존재의 의미를 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치 꽃은 말하지 않지만 그 감흥과 기쁨과 의미와 의식은 마음과 기억의 어느 편에 자리한다는 과학과 믿음의 교차점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몇 년 전 우리나라의 두 소녀가 불의의 사고로 미군의 장갑차에 의해 사망하게 되었을 때에도 많은 국민들이 촛불시위를 여러 날 했었다. 그 당시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시위하는 어느 한국 청년이 유명 미국 상표의 청바지를 입고 촛불을 씌운 종이컵은 유명 미국 커피회사 상표가 있었다.
구지 우리 입장에서 이야기한다면 미국에 대한 적대감이 아니라 친화력과 더불어 시정 안을 격식 있게 구하는 거라 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날 성조기를 태우고 찢는 장면을 보면 가히 그 의미는 아이러니일 것이다. 필자가 조심스레 짐작하기로 이는 아마도 숙고나 사려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리라 여겨진다. 물론 지금의 시위는 많이 다르다. 국민들의 의식이 상승하면서 시위문화도 선진국화로 가려는 노력들이 보인다.
격동의 근현대 문화의 한 가운데를 살아온 시인이며 사상가인 분을 만난 적이 있다. “선생님, 우리 젊은이들에게 좋은 말씀 한번 해주시죠.” 그의 대답은, “열광하는 군중은 있어도, 감동하는 젊은이는 없네요.” 아무래도 현대의 대중문화가 감각을 통한 희로애락의 진실이라면, 이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성과 감정을 통한 진실한 표현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필자가 여전히 씁쓸한 것은, 학문의 요람이요 상아탑이라 우러러 보던 젊음과 패기의 캠퍼스 축제가 열리고 거기에 대중음악 가수들을 초대하는데 많게는 1억 원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바라는 것이라 어쩔 수 없다는 학생회의 입장이지만, 등록금 동결을 위해 일사각오로 싸우던 때가 불과 연초였는데 하고 생각하면 내자신도 이제 나이가 들어 이들을 이해 못하는 세대가 되었나 싶어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나는 한국의 젊은이들과 모든 국민들에게 큰 소망을 기대한다. 그들의 시위 의식이 분명한 명분을 가지고 올바른 나라 사랑을 실천하는 역동적 모습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목사로서 믿음을 가지고 확신하며 기도한다.
아울러 더 건전하고 더 격식을 갖추고 더 예의바른 시위 집회문화가 자리 잡도록 기도한다. 그리고 그러한 고요하면서도 힘 있는 외침에, 정부는 수월하거나 무시하는 입장으로 권력을 과시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이것이 진정으로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민주시위문화에 대한 나의 희망의 찬 비전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