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나를 바라본다.
·세계는 보이고 싶어하고 항상 눈을 뜬 채 적극적인 호기심 속에서 산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L 선생님의 가정방문을 따라나선 길이었다. 산 중턱에 걸린 급우 집을 68명 중 마지막 순서로 다녀오다 쉬면서 듣던 열차의 목쉰 기적소리, 또 내려다보이던 실뱀 같은 하천. “높은 곳에서 보니 다르지?” 어쩌면 선생님의 손가락 방향을 따라 새의 눈(버즈 아이)으로 사물 보는 법을 익히고 있었을 것이다.
학교 뒤편, 등나무 아치를 지나면 동화 속의 과자로 만든 집 같은 도서관이 있었다. 수호천사처럼 온화하게 반기던 S 선생님이 거기 계셨다.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책 보다 무료하면 팔 괴고 떡갈나무 잎들 틈새로 보던 하늘. 고양이 눈(캣츠 아이)으로 세상 보기는 그때 시작됐다.
멋쟁이 H 선생님. 원조 미니스커트를 천박하지 않게 소화했던 선생님은 절제된 노출을 통해 인간이 소유한 감각에서 시각이 가장 발달한 감각임을 보여줬다. 뻔뻔함, 더 지연된 형태로 응시하는 눈힘. 이후로 다른 감각보다 시각의 우세성을 실천적으로 지지한다.
또 다른 K 선생님은 눈 없는 진드기, 나무 위에서 몇 년이고 굶기도 하며 지나가는 포유동물 위로 적시에 떨어지는 진드기의 감각을 전해줬다. 4만 배율 현미경으로 크게 또는 작게 보는 법을 가르쳐준 선생님. 지금 나무를 보며 잎맥까지 투시한다고 믿는 건 그 때문이다.
J 선생님. 밖에서 장원을 먹었지만 졸작인 「골목길」에 “금방이라도 개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물 것 같은 긴장감”이라며 후한 품평을 내렸었다. 그분이 떠나고 부임한 P 선생님은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라는 미켈란젤로 같은 말씀으로 단순함의 미학을 가르쳤다. 말과 자료의 지나침으로 잃는 기회비용은 지금도 조심하고 있다.
한쪽만 보는 편견을 질타하던 M 선생님, 보는 눈에서 인식하는 눈으로 개안하게 한 C 선생님, 자기가치감과 긍정의 시각을 일깨워준 O 선생님의 가르침도 여전히 유효하게 살아 있다. 그리하여 나의 문화 능력(cultural literacy)을 이루고 아는 눈, 말하는 눈, 결정하는 눈, 통치하는 눈 등 시선의 주권을 회복시켜주신 모든 선생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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