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성효 대전시장 |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유교적 윤리개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일종의 운명론적인 관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스승의 존재는 국가나 부모님처럼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맺어지는 특별관계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언제나 자녀들에게 기대했던 것은 현실을 뛰어 넘기 위한 배움이었다. 그리고 흔히들 교육열이라 표현하는 그러한 기대의 바탕에는 선생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깔려 있었으며, 그 신뢰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처럼 어떠한 논리적 근거나 설명을 요하지 않는 그 자체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교편(敎鞭)을 잡는 선생님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수는 늘었지만, 스승으로서 대우받는 선생님의 수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교편이 사랑의 매가 아닌 폭력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학교가 학생들에게 지식만 충전시키는 곳으로 매도되기도 한다. 부존자원이나 광대한 영토가 없는 우리나라는 오로지 인재만이 희망이다. 인재는 교육의 결과이며, 그 교육의 원천에는 우리의 선생님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선생님들이 올바로 서지 못하고,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됨은 당연한 논리이다.
시내 대로변을 다니다 보면 학생들을 실어 나르기 위한 승합차와 버스들이 학원주변에 길게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안쓰러울 때도 있지만 한편으로 이들에게 과연 학교는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초`중`고교생의 사교육비만 20조원을 넘어 실제로는 초`중`고 교육예산(26조원)을 초과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그 의구심은 불안감과 슬픔으로 바뀌게 된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아직까지도 학교는 모든 이에게 배움의 평등을 주는 유일한 곳이고, 험난한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는 우리 학생들이 의지해야 할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명예나 금전적 보상보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반갑게 달려와 인사하는 제자가 있다는 사실에 무한한 보람을 느끼는 참스승들이 우리의 교단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성직자 헨리 반 다이크(Henry Van Dyke)가 무명교사예찬에서 ‘지식은 책에서 배울 수 있지만 지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오직 마음으로 손을 맞잡아 배울 수 있다’고 하며 무명교사를 찬미한 것도 우리가 곱씹어야 할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해마다 이맘때면 스승의 날을 두고 많은 말들이 오고 간다. 심지어 스승의 날의 폐해를 논하기도 한다. 하지만 변하지 말아야 할 본질은 스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우리시가 전국 최초로 스승주간을 지정하고 스승존경 다짐대회, 스승의 나무심기 등 20여 개의 스승존경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나무심기와 마찬가지로 스승존경운동도 우리시의 미래를 밝히는 일이며, 또한 시민들의 공감대 형성이 필요한 사업이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스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하나로 모일 때 우리의 참스승들은 더욱 많은 용기를 갖게 되고 우리 자녀들은 더욱 올바르게 자랄 수 있다고 믿는다. 아직도 선생님은 우리에게 ‘길’이기 때문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