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기조 예총 수석부회장 겸 한국문협 명예회장 |
최근에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색다른 전시회라고 말하는 ‘post 1945`란 퍼포먼스였다. “여러분 사이를 걸어다니며 전시를 관람하고 있는 창녀가 누구인지 찾아낸 분에게 120만원을 지급한다”고 전시장에 쓰여 있었다. 엔간한 자극이야 눈 하나 깜빡 않는다지만 이쯤 되면 눈에 번쩍 뜨이지 않을 수 없다.
공창제도가 없어진 마당에 직업적 창녀란 있을 수 없다. 지금은 성매매 여성 쯤으로 부르는게 피차 낯 뜨겁지 않은 상태인데도 ‘이곳에는 의도적으로 창녀가 초대되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관객들은 누가 창녀인지 모르면서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 얼굴 화장, 걸음걸이나 분위기를 보면서 120만원을 받기 위하여 창녀를 찾아내야 한다.
아무리 짐작이 간다 해도 낯모르는 여성에게 ‘창녀`라고 말하기에는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이 예술이란 이름으로 행해진다는 것은 앞서 말한 민중미술이란 이름과 같이 어색하고 최저한의 상식을 벗어난 것 같았다. 아무리 예술이래도 미학적 한계선은 있어야 한다.
무엇이 예술인가, 통상적인 사회적 윤리의식이나 도덕성은 갖춰있어야 한다. 거리에서 싸우는 일이나 고함지르는 일, 유행이란 이름을 빌려 거의 벗다 싶이 차려 입은 행위들이 퍼포먼스가 될 수 없듯, 미술 전시회도 마찬가지란 생각이다. 아무리 전위예술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상식을 벗어날 수는 없다.
함께 전시회를 관람하는 생판 모르는 사람을 ‘창녀`라고 외치고 맞다고 대답하면 돈을 받는 일이라면 호기심에서도 한 번 해보고 싶을테지만 만약 지적한 여인이 ‘창녀`가 아닐진댄 어떤 일이 벌어 질 것인가, 멀쩡한 여인을 창녀라고 불렀던 사람은 무참히 망신을 당할게 뻔하고 창녀라고 지목된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언어폭력에 심하게 반발하고 당황해 할 것이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예견하고도 무엇인가 표현하고 싶어서 이런 퍼포먼스를 꾸몄다면 조금은 잔인하다.
예술은 무엇이고 될 수 있지만 예술로 표현해 낼 수 없는 것을 가지는 것은 예술가의 사람 됨됨이에 달려있다. 어떤 것이고 예술이 된다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예술로 나타내 보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예술로 전부 나타낼 수도 없지만 그 영향은 두 말할 것 없이 혼란의 극치에 이를 것이다. 예술도 사람의 삶에 필요한 것들만 골라 창작되고 그 영향아래서 행복하고 즐기는 삶을 누려야 된다. 온갖 쓰레기, 버려야 할 것들이 예술로 둔갑한다면 우리들은 살맛을 잃게 된다.
바다와 육지가 잘 어울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던 태안반도가 기름으로 뒤범벅이 된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랬던가, 만약 기름이 유출되지 않고 기름은 기름대로 쓰였다면 에너지를 얻어 수많은 생산품이 출현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리아스식 해안을 자랑하는 태안반도는 한껏 경치를 자랑할 것이고 청정해협에서 잡혀 온 생선은 관광객들의 입맛을 돋굴것이다. 그런데도 바지선이 유조선을 들이 받는 황당스런 사고가 태안 앞바다를 망쳤고 우리들은 사상 유례없는 봉사활동에 첨가해야했다.
이 기름 유출사고와 비교되는 쓸데없는 것들이 예술이란 이름으로 자행된다면 우리들의 심성은 기름범벅이 된 태안 앞바다와 같아 질것이고 정신과 영혼은 함께 황폐화 될 것이다.
예술은 예술다워야 한다. 예술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적 영혼의 파괴`는 이제 그만 중지되어야 한다. 무엇이 예술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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