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사건이 늘 두 번째 사건의 원인은 아니요, 여러 사건에 개입된 다른 요인이 있을 수도 있다. 여성 투표권이 없었을 때는 핵무기도 없었어. 이렇게 말한다면 전후 인과관계를 혼동한 오류다. 인과관계의 조합이 길고 원인이 불명확할수록 책임을 떠넘길 소지가 많아진다. 보령 죽도 바닷물 범람을 놓고도 그랬다.
모든 것은 우연의 부산물처럼 보였다. 강한 바닷물 흐름과 방파제, 먼바다 너울 탓이라 했다. 먹통예고와 장비나 데이터를 탓하기도 했다. 바람이 좀 셌으면 바람의, 파고가 좀더 높았으면 파도의 탓이었다. 다각적인 원인 규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기계적 중립 등 그사이의 책임론은 반성할 대목이 적지 않다. 가령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의 일차적 문제가 시민의식인데 행정기관에만 미뤄지는 식이었다. 비행 학생은 도매금으로 선생님 책임이고 물가인상은 기업에만 책임을 떠넘기기 일쑤였다. 이렇게 가면 시민은 자기책임을 망각하고 현대사회의 제(諸)문제는 끝없이 재생산된다.
광우병 발생 확률과 너울성 파도라는 인과관계의 링크에 기대려는 지금 꼴이 그러하다. 미국 쇠고기와 바닷물 범람을 놓고 책임 있는 당국자들은 ‘표정관리`와 ‘연출된 자아` 강조에 바쁘다. 사건과 사고를 팔자 소관과 기막힌 우연의 일치로 돌리려는 성급한 일반화는 불쌍한 속죄양을 양산한다. 소 방귀에 지구온난화 혐의를 씌우는 음모는 이보다 얼마나 순진하고 무구한가.
‘내 탓이오`가 신앙적 차원이라 어렵다면 ‘내 탓도 있다`는 공변된 윤리라도 아쉽다. 미래 예측능력을 키우려면 주장과 근거를 맞추는 훈련부터 해야 할 것이다. 국회 쇠고기 청문회만은 잘못된 인과관계의 오류를 보이지 않기 바란다. 바람 불면 통 장수가 돈 번다는 논리로 언제까지 일관할지 지켜보는 것도 넌더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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