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
가난한 그 거리에서 그들만큼 신산스럽게 살아가던 어린 소녀들에게 중국인들은 밀수업자, 아편 쟁이, 쿠리, 마적단, 오랑캐 그리고 사람 고기로 만두를 빚는 백정 혹은 북만주 벌판의 똥 덩어리였다. 사람 좋게 꾸룩꾸룩 웃는 푸줏간의 홀아비 중국인과 우수와 비애에 잠긴 이층집에 사는 청년도 있었다. 그들 모두 한없는 호기심과 상상력의 대상이었다.
한국전쟁의 포연이 채 걷히기 전의 어둡고 스산한 중국인 거리를 오정희 선생님은 30여 년 후에 소설로 옮겼다. 1979년 무렵이었다. 그로부터 서른 해가 지나 엊그제 다시 ‘중국인 거리’이야기를 접하게 됐다. 이번엔 언론을 통해서였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오성홍기를 휘날리는 중국인 유학생 만여명이 백주에 서울 한복판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더 이상 오정희의 작품 ‘중국인 거리’에 살던 가난하고 유순하며 늙은, 혹은 전족한 발로 뒤뚱거리며 조심조심 걷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미소를 지으며 삼색 물감들인 빵을 소녀에게 건네주는 수줍음 많은 이층집 중국 청년이 아니었다.
서울 거리를 질주하는 중국인들은 젊었다. 광포한 중국인 시위대 앞에서 한국인들은 무력하였고 그들의 폭력 행사를 방관한 한국의 공권력에 절망하였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혐오와 우리나라 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이 부글부글 끓었다. 언론은 ‘있는 것’을 보여주지만, 언론이 보여주는 것이 ‘있는 것’의 전부가 아니다. 언론이 전하고 인터넷에서 무한 재생산되고 있는 서울의 중국인 거리 이야기는 신문`방송 같은 미디어가 우리에게 과연 어떤 존재인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전율스러운 질문을 던지게 한다.
중국 유학생들은 서방의 언론들이 티베트에 대해 왜곡된 보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 언론 역시 서방의 언론에 함부로 휘둘려 티베트의 진실을 보도하지 않으며 더욱이 이번 서울의 중국인 거리 사태를 한국 언론이 편파적으로 보도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편, 중국인 유학생들이 티베트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과 지식은 우리가 학교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배워서 알고 있는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중국인 유학생들 역시 그들의 교육체계와 그들의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티베트를 봐 왔을 것이다. 앎의 범위와 사고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미디어와 학교 교육이다. 중국의 동쪽에 있는 바다는 우리의 서해다. 일본인들의 서쪽에 위치한 바다는 자고로 우리에게 동해 그 자체다. 앎과 사고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서로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들이 얼마나 다른지, 왜 다른지 서로 터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생산적이다. 싸우지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하지 않은가.
우리 지역의 각 대학에는 수 백명 씩의 중국인 청년들이 유학하고 있다. 언론보도와 인터넷 여론에 의해 중국인 유학생들을 보는 사회의 시선이 싸늘하고 날카롭다. 대학 캠퍼스에서 접하는 양국 학생들의 분위기도 다소 서먹하게 느껴진다. 다수의 유학생을 수용한 우리 지역의 각 대학은 중국인 청년들의 앎과 지식, 번민과 아픔에 대해 구체적인 관심과 배려가 필요할 때다.
중국인 유학생들을 단순히 학생정원이나 채워주고 부족한 등록금이나 메워 주는 그런 대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역사와 문화와 법 질서에 대한 사고의 차이를 해소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교육 서비스를 제공해 줘야 한다. 대학과 대학 종사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