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5월, 보리밭과 여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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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밖]5월, 보리밭과 여인과...

  • 승인 2008-05-01 00:00
  • 신문게재 2008-05-02 21면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보리밭. 물결치는 그 초록바다, 바람의 깊이를 가늠하고 싶은 욕구가 일렁인다. 음양이 조화로운 5월. 고창 학원농장 청보리축제(∼12일)에라도 한번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에 두어 뼘 남짓 되는 보리밭의 추억을 더듬는다. 쑥쑥 자라라, 빛나는 보리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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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화를 세계화로 착각해 병통이 되기도 하지만 미국은 세계가 모인 나라다. 한국야구는 코리안시리즈, 일본은 재팬시리즈인데 미국은 자기네 야구를 월드시리즈라 부른다. 없는 게 별로 없는 그곳에 가면 그걸 시비할 생각조차 꼬리를 내린다. 대전 유성구청과 카이스트 사이에 제2의 이태원거리를 만든다고 하고, 인천에 차이나타운 엇비슷한 게 있지만 미국의 구색을 따라잡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미국에는 알다시피 코리아타운과 차이나타운, 리틀 도쿄 등이 있다. 이탈리아 거리, 멕시코 거리가 있고 유태인 지구가 있다. 스페인 과수원과 노르웨이 보리밭도 있다. 한국의 보리밭만 추가하면 국제인종집합소로서 손색없을 텐데 그건 없다.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없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든 세대에게 한국의 보리밭은 향수병을 도지게 하고 민족정서를 건드리는 흥분제 아니던가. 참을 수 없는 바람의 애무에 풋보리 춤바람이 날 즈음이면 몸이 근질거려, 보리밭의 일렁임과 휘파람 소리의 애환과 청보리 같은 옛 여자 생각에 뜬금없이 귀국하려는 교포도 혹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숙자 「청맥(靑麥)」
▲ 이숙자 「청맥(靑麥)」
그런데 막상 오면 보리밭 만나기란 쉽지 않고, 만난다 하더라도 시골 아닌 도심의 공원 옆구리나 구석진 공한지에 조성해 ‘체험동산`으로 꾸민 보리밭이 고작이다. 체험이라 한들, 보릿대 뽑아 보리피리 불던 애환까지 알까. 초근목피 연명하던 조부모나 부모 세대의 빈곤을, 보리개떡과 고구마 소리만 꺼내도 질린다는 어르신들의 짠한 심정이야 헤아릴 수 있을까. 품음직한 포즈의 이브가 뱀처럼 도사리는 이숙자식(式) 보리밭의 초록과 꽃자주색 원초성은 또 어떻게 체험시킬까.

아마 아닐 것이다. 종달새 날리고 깜부기 뽑는다는 핑계로 드나들던 보리밭도, 상품성에 길들여지지 않은 보리밭의 여인도, 풋풋함과 애잔함과 건강한 에로티시즘과는 거리 먼 그런 것들. 그저 보리새싹이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웰빙식품이고 양념해서 살짝 버무리면 향미가 있다는 것, 조경용이나 꽃꽂이 장식용의 ‘풀`이라는 정도일 것이다. 보리밭이 본능을 일깨운다는 깊은 속뜻은 어림짐작이나 할까.

하나의 정욕은 하나의 보리알과 같다. 괴테의 추억같이 스치는 이 말보다 계룡로 가로수 플라타너스 가로수에 정신장애우 일동이 매단 팻말이 더 눈에 밟힌다. ‘보리가 심어져 있으니 쓰레기 버리지 말아 주세요.` 오래 전에 본 킴 카잘리의 연작만화 한 컷도 보리밭 이랑을 거슬러 걷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사람을 맥없이 보리밭으로 내몰고 있다. 사랑이란 보리밭에 길을 내는 것이라는, 빛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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