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숟가락이 소중한 도구임은 야구장에서도 확인했다. 지난주 기아 타이거즈와의 경기 도중 우리 히어로즈 투수가 마운드에서 신발 스파이크의 흙을 파내는 데 썼다. 급기야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이 식사도구는 그 이틀 뒤 우리 정치판에 화두(?)로 등장한다.
발단은 청와대 여야 지도부 초청 오찬에 이회창 선진당 총재가 초대받지 못한 것. 당사자인 이 총재는 “젓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는데…”라며 발끈했다. 숟가락과 젓가락의 지향점은 같다. 또, “숟가락 하나 더 놓자는 게 아니(다)”라는 같은 당 류근찬 정책위의장은 “충청인에 대한 보복”이라고 소수정파가 겪는 왕따 설움을 입언(立言)했다.
가끔 우리는 뚝배기 그릇에 숟가락을 함께 담그는 행위에서 극상등의 일체감을 맛본다. 숟가락이 쇠손가락이면 손가락은 부모가 내린 만능 숟가락이다. 원내교섭단체(의석 20석 이상 정당) 요건에 못 든다고 숟가락 놓기를 거부한 청와대나 여당도, 민주당도 속 좁다. DJ 때 민주당 3석을 자민련에 꿔주고 이에 반발한 강창희 의원이 제명당한 ‘사건`은 주머니 구구에 박 터지던 옛일이다.
다 제쳐두고, 선진당에서 보고 싶은 모습이 있다. 다 된 밥에 숟가락 들고 덤비는 정치와 결별하는 자세, 지역에 뿌리를 뒀지만 지역주의 정당의 한계를 벗는 당찬 모습, 그리고 선진당의 생명이 숫자에 없고 정체성에 있다고 한다면, 충청권 18석을 바람몰이한 그 말 아래[馬下]로 내려와 선진당의 새 숟가락을 드는 의연함이다.
모자란 2석을 채워 언젠가 비교섭단체의 비애를 벗더라도 이는 한결같아야 한다. 유리걸식 거지의 허리춤에도, 탁발승의 바랑에도 숟가락은 있다. 영입작업보다 중요한 것은 제 수저, 제 밥그릇 제 손으로 챙기기다. 그러지 못할 바엔, 운동화 스파이크에 들러붙은 흙을 누룽지 긁듯 긁는 야구선수처럼 숟가락의 다른 용도라도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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