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요한 목원대학교 총장 |
나는 어려서부터 꽃밭에서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날에는 화원이라는 것이 별도로 없었던 때였지만 우리 부모님들은 유난히 꽃을 좋아해 집 안팎에 꽃을 많이 심었다. 어느 해에는 어머니께서 우리 집 밭에 채소대신 온통 꽃을 심으셨다. 그러다보니 대낮에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턱대고 우리 집안에 들어와서 꽃 몇 송이만 달라고 조르곤 했다. 물론 우리 어머니는 웃는 얼굴로 꽃을 나눠주곤 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 돌아와 책가방을 내려놓고 꼭 했던 일은 꽃에 물을 주는 일이었다. 더운 여름날 하루라도 꽃에 물을 주지 않으면 꽃들은 곧 시들어 생기를 잃어버리거나 심하면 말라죽기도 했다. 부모님이 특별히 시킨 일은 아니었는데 나는 꽃밭에 물을 주는 일이 매우 신나는 일이라고 느꼈다. 더운 여름 오후에 물을 가지고 시간을 보내는 일이 때로는 친구들하고 노는 일보다 더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안에는 꽃에 얽힌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온 식구가 한국 전쟁때 남쪽으로 피난오기 전 이북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버지는 공산당 치하에서 목사일을 하고 계셨다. 당시 이북에서 목사로서 살아가는 일은 대단히 어려웠다. 무신론자들인 공산당이 제일 싫어하는 집단이 종교인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을 가장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 집단의 대표인 목사를 없애버리는 일에 혈안이 돼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했다.
우리 아버지는 공산주의자들에게서부터 벗어나기 위해 늘 피신을 다녔다. 주로 시골의 먼 친척집이나 산골의 토굴 속에서 기거했다. 가족들과 함께해야 할 때는 시골 교회당 지붕 꼭대기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 놓고 낮에는 그 곳에 숨어 계시다 밤에는 집으로 내려오시곤 했다. 그 때 아버지가 교회당 꼭대기에 숨어계실 때 꼭 가지고 다닌 것은 성경책과 촛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잊지 않으셨던 것은 꽃이 핀 화분 하나를 숨어계시던 곳에 갖다 놓으셨었다는 것이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꽃 한 송이로부터의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단다. 역시 이북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여름 날 우리 집 앞에는 백합꽃들이 잔뜩 피어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꽃밭에서 백합꽃들을 다듬고 계셨는데 지나가던 여인네 한 사람이 꽃향기에 취해 한참이나 서성대고 있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아버지는 그 여인에게 꽃을 좋아하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대답을 했단다. 그래서 아버지는 백합 몇 송이를 꺽어서 그 여인에게 주었더니 그 여인은 정말로 고맙다고 인사하며 가더란다.
그런데 그날 밤 자정이 지났을 무렵 웬 남자가 집으로 찾아와 우리 아버지를 급히 만나자고 했단다. 문을 열고 밖에 나갔더니 그 남자가 빨리 오늘 밤을 넘기지 말고 피신하라는 것이었다. 내일 새벽에 공산당들이 목사님을 잡으러 올테니 되도록 멀리 피신하라고 하면서 낮에 자기 아내에게 꽃을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어두움 속으로 사라졌단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그 남자는 그 지역 비밀 공산당 책임자였다는 것이다. 백합꽃이 우리 가정을 지킨 것이었다.
남들은 모르지만 지금도 내 몸 어디엔가는 늘 꽃이 숨겨져 있다. 왠지 모르지만 내 몸 가까이 꽃이 없으면 불안하다. 그래서 나는 계절마다 꽃밭에서 떨어진 꽃잎 등을 말려서는 남몰래 늘 지갑 속에 넣고 다닌다. 그래야만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오늘도 연산홍이 만발해 있는 캠퍼스를 내려다보면서 우리 가정의 꽃 사랑이 후손들에게도 계속 이어져가기를 바란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들에게 사랑과 생명을 선물해주며 주위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행복감을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언제쯤 이 세상이 꽃으로 뒤덮힐 날이 올까. 전쟁과 죽음이 없고 평화와 웃음이 넘치는 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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