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사회지도층 이라함은 사회적으로 덕망 있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이 정도의 인격을 갖춘 분이라라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할 줄 알고 없는 자에게 인정도 베풀 수 있는 계층이다. 사회지도층 모두를 싸잡아 매도하고 싶은 의도는 없지만 소외계층에 대한 편견과 양극화로 인한 차별이 점점 심화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루 술로 먹는 술값은 아깝지 않고, 1만 원짜리 후원금을 내거나 CMS용지에 서명하는 일엔 인색하다. 그러나 때 묻은 샐러리맨들의 선량한 주머니는 소외계층을 위한 눈물을 닦아주고 있지만, 사회지도층의 속주머니에서는 좀처럼 나올 줄 모른다. “가난하다는 말은 배고픔과 헐벗음과 풍차노숙(風餐露宿)이 아우러져야 본뜻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가난은 몸소 겪어 봐야지 그 무서움과 서러움을 알 수 있는 것이지 백번 들어봐도 모른다.”고 전 동아일보 기자를 지내신 정상희씨가 남긴 말이다. 필자가 6.25사변 직후 김천으로 피난 갔을 때다, 먹을 것이 없던 그 시절 자존심 다 버리고 밥을 얻어먹던 생각이 난다. 그래도 그 시절 허기졌던 시대에 먹을거리가 풍요했고 인심도 따뜻하여 외로움이 덜했다.
오스카 루이스(Oscar Lawis)는 가난 그 자체와는 다른 가난의 문화라는 것이 존재했다고 말했다. 가난의 문화라 함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생활의 방법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는 이를 일러 기층문화라 말했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만나면 이미 가난하다는 의미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는 걸레 같이 헤진 베옷을 걸치고 다녔으나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증자(曾子)도 비록 굶었으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사회지도층이나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은 가난한 자, 소외계층을 보면 마치 혹성에서 온 사람처럼 더러운 짐승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기층문화로 말하면 사상성을 의심한다. 기업인이 터졌다면 몇 조, 몇 천억, 정치인 비리가 터졌다면 몇 백억이요, 수십억 원이다. 기층기민이 볼 때에는 칼만 안 들었을 뿐 강도나 다름없다.
가난은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난의 긴 터널을 지내봐야만 삶의 기쁨도 알고 삶이 무엇인지 보일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 가난한 이웃을 도울 줄 아는 미학(美學)이 무엇인지 그때야 깨달음을 알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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