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경동 중문침례교회 목사 |
더 엄밀히 말하면 ‘자유’ 민주 공화국이라 할 수 있다. 이 술어적 표현만으로도 3가지 이상의 정의로 숙고할 수 있는 내용이라 여겨진다.
민주(民主)라는 표현은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이다. 곧 정치의 주체가 국민이라는 말이다. 직접이나 간접에 관계없이 관료나 대의에 의해서라도 민의(民意)가 반영되는 정치의 형태가 된다. 딱히 민주정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도 임금들이 미행으로 민심을 살피는 모습이 더러 있었다.
공화국이란 선거에 의해 유권자인 국민이 일정한 임기를 정하여 국가의 대표를 뽑는 나라의 형태다. 근대의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 시민 혁명이래 세워진 형태가 공화국체제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영국이나 일본은 민주국가이긴 해도 공화국이 아닌 군주국이다.
앞서 덧 붙여 말했던 ‘자유’의 의미는 정치 경제적의미가 짙은 표현이다. 계획경제가 아니라 자유경쟁시장체제가 나라의 경제적 형편을 저절로 유기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기대의 형태를 기본적 이론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이론적인 표현으로는 북한도 민주국가다. 마르크스가 주장하던 정치형태도 고대 아테네 같은 직접민주정이다. 그러나 시장에 그 살림을 맡기지 않는 형태이기에 ‘인민(人民)민주주의’라 부른다. 그러나 여기에도 자본주의시장의 애로사항이 있는 것처럼, 공산국가에도 인민의 대리자인 관료가 득세를 하는 허점을 드러내고 만다.
여러 목적과 지향과 추구에도 불구하고 시행착오는, 본질은 고수하고 지킴에도 그 시행에 있어 대안과 보완점을 찾고 있으니,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원시 민주, 공화정, 왕정, 상공지배정치 모두 시민과 백성을 위한 선의(善意)였음에 칭찬의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난해하고 엉킨 실타래 같은 혼돈에서도 꾸준히 앞으로 나아간다면 뒤죽박죽인 허물도 다 덮을 수 있는 것이 주역(周易)의 사상이다. 이는 교만도 자랑도 속단도 지양하는 미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니 곧 겸손과 배려와 존중이라는 민주의 모델을 이에 적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민주 정치의 주체는 국민이며, 그 대상은 국가와 사회이다. 허나 이번 총선을 통한 승리의 개가랍시고 당선사례를 하는 위대한 분들 중에는 가장 큰 본질을 잃어버린 분들이 더러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야당의 당수를 경선의 상대로 하여 당선된 여당 후보가 사례하면서, 충무공의 동상 앞에서 조선수군장의 갑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의 소감이 참 명품 대사다.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정신으로 왜적을 물리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으로 이번 선거에 임했습니다.”
그분이 말하는 이번 경선은 전쟁이고, 그분이 말하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왜적이 누구란 인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선 왜구와 싸우다 숨진 스승이 검을 그에게 선물하는데, ‘止戈’(지과)라 새겨져 있다. 그칠 지(止) 창 과 (戈) 그것이 ‘武(무)’다. 날카롭고 차갑고 단단한 철 병기를 든 참 목적은, 따스함과 행복과 포근함을 회복하고 지키며 무력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 당선자의 퍼포먼스에서는 호전성만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민주정치는 국민의 다양한 소리를 수렴하는 것이다. 그러니 획일적인 진리라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파시즘이라는 전체주의의 괴물을 양육하는 것 밖에 안 된다. 정치를 했던 제시 잭슨 목사가 말했고 리영희 선생이 공감했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이 있다.
민주정은 여러 형편의 고하의 국민뿐만 아니라, 좌우-보수와 진보의 모든 소리가 수렴되는 장이다. 그러니 나와 형편이 다르고 입장이 다른 사람은 왜적이 아니다. 우리의 이웃이다.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할 내 민족, 내 형제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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