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는 확실히 주관적이다. 에스키모들은 내리는 눈(qanik), 쌓인 눈(aput), 마시는 눈(aniu), 얼음집 만드는 눈(quviq) 등등, 눈을 수십 가지로 세분화한다. 날씨에 대한 시각도 제각각이다. 뉴욕에서 쉴새없이 퍼붓는 비가 런던에 가면 스모그 가라앉힐 정도의 비로 화한다. 골프광이라면 착한 눈, 나쁜 눈의 이분법을 쓰기도 할 것이다.
우리도 안 그런가. 가령 기상청이 측정 못하는 감성적인 비가 있다. 궂은 비는 음우(陰雨), 생물에게 은혜 주면 자우(慈雨), 매화꽃 필 때 내리면 매우(梅雨), 푸른 잎에 매달린 여름비가 취우(翠雨)다. 알맞은 단비인 감우(甘雨), 때맞춰 오는 시우(時雨)는 극히 상대적이다.
필요에 따라 또 개념은 곧잘 창조된다. 충청도 농민들은 대추나무 있던 논을 대추나무배비라 한다. 땅이 질퍽질퍽 진 논은 진걸, 높은 곳의 논은 동산배미, 연꽃처럼 생겼으면 연꽃배미, 장화 모양이면 장화배미다.
어느 경우든 자기중심적이다. “민심 무섭다는 걸 알았어요.” 패자가 아닌, 국회의원에 당선된 선진당 인사 입에서 나온 승자의 여유다. 국가도 자기중심적이다. 영국에서 콘돔이 프랑스 편지봉투와 닮았다고 ‘프랑스인의 편지’(프렌치 레터)로 부르면 프랑스는 ‘영국인의 외투’, ‘영국인의 모자’로 받는다.
우주도 자기중심적이고, 해가 뜨고 별들이 우리 주위를 운행한다는 사고는 오만의 극치다. 그 무중력에서의 깨달음이 어찌 “잘 먹고, 살고, 배변하는” 카타르시스만일까. 고작 수백 미터 산에 올라 저 아래를 굽어보고 유한자인 자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물음을 구하는 우린데, 지구별에서 바동바동 산 것에 대한 반성만일까.
도킹을 풀고 내일(19일) 귀환하는 이소연씨. 가까워지거나 기약 없을 때 사람은 더 못 기다리는 법. 한국 우주인이 생각의 불꽃을 활활 지피는데 원고지는 모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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