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종호 충남대 국문과 교수, 시인 |
2003년 파출소가 지구대로 개편되기 전 대전 시내 변두리의 한 파출소에서 있었던 일이라 한다. 동네에 망나니로 소문난 사람이 술만 취하면 파출소에 들러 마치 자신이 상관이라도 되는 양 한 바탕 훈시를 늘어놓고 횡설수설하다가 가곤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며칠이고 반복되었다. 처벌을 해봐야 별 효과도 없으니 경찰들도 아예 무시하고 웃어넘기며 지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야기를 전하는 분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웃지도 못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후 경찰에 불만이 있다며 차를 몰고 파출소로 돌진하는 사건 등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공권력 불신과 무시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게 되었다.
경찰에 관한한 우리사회는 마치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듯하다. 1년 365일 가운데 단 1초라도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 경찰서와 지구대다. 그리고 경찰 한 사람이 담당하는 국민의 수는 금년의 경우 511명이다. 1999년에 518명이었으니 지난 10년여 동안 개선된 것이 거의 없는 셈이다. 그 사이 실제 업무 처리 건수는 약 4배 가까이 증가하였고 우리사회의 범죄 유형은 사이버범죄, 외국인 범죄, 마약류범죄 등과 같이 더욱 다양해졌다. 또한 갈수록 흉악해져 지난해만 범인 피격 등에 의해 다친 경찰관 공상자수가 1,413명에 이르고 있으며 지난 해 순직 경찰의 사유에는 과로사가 50%로 가장 많았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과연 경찰에게 완벽한 민생치안을 요구할 수 있을까?
경찰청은 지난 2월부터 정책 내근부서의 인원을 감축하여 1,955명의 인원을 민생부서로 돌려 현장치안력을 강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사 인원 1인당 사건처리 건수가 108건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공휴일을 제외한 근무일이 300일이라 해도 살인, 강도 등 주요범죄를 포함한 사건을 3일에 1건씩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거기에 ‘민생범죄소탕 100일 작전` 같은 기획수사에 시간을 빼앗기고 그 사이 범죄자들은 미국드라마 C.S.I.(과학수사대) 등을 흉내 내면서 더욱 지능화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이라면 제 2의 혜진이 예슬이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아니 이러한 근무여건 속에서 그 동안 우리 사회의 치안을 유지해 온 경찰에 대해 오히려 경외심이 들 정도다.
경찰의 사기 진작과 사회적 위상의 재정립이 시급하다. 이대통령이 혜진이 예슬이 사건으로 일산경찰서를 방문한 것은 십분 이해되는 일이지만 현실적 예산이 뒷받침 되는 경찰의 구조적 혁신과 비전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못내 아쉽다. 경찰청장은 취임사에서 ‘현장 중심의 실용주의`와 함께 ‘근무 여건의 개선`을 강조했지만, 인력 증원과 현실적인 재정 확보가 없이는 근원적인 문제해결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도 국민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경찰이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줘야 한다. 내 가정의 안전과 평화가 중요하다면 경찰 가족들의 안전과 평화도 중요하다. 박봉에 사비를 쓰면서까지 수사를 해야 하고 강력사건의 경우 일 주일 넘게 집에 들어갈 수 없는 열악한 수사근무 여건에서 완벽한 민주경찰, 민생치안을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오히려 반민주적이다.
경찰도 뼈를 깎는 자기성찰과 거듭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온 국민이 우리 경찰을 일으켜 세워줘야 할 때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범죄 없는 새로운 미래 사회를 위해서라도 모두에게 신뢰받는 엄정한 공권력이 확립되고 경찰의 사회적 위상이 재정립될 수 있도록 다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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