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희 대덕초 교감 |
독일의 작가 안톤 슈낙 수필의 한 구절입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때에는 그의 아름다운 글을 끝까지 외웠는데 요즘은 첫 부분만 자꾸 떠오릅니다. 어디선가 우리 아이들의 울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커다란 독수리 앞에 작은 새처럼 떨고 있는 것만 같아서 다가오는 계절도 많이 불안합니다. CCTV를 통해서야 우리는 현장을 똑똑히 목격하였고, 이제야 ‘제시카법’이니 ‘메건법’이니 외국의 본을 따서 ‘혜진·예슬법’을 만든다고 합니다만,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모릅니다.
집이 어두운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합니다. 차라리 밖이 낫다는 것입니다. 집나간 엄마, 술 먹는 아빠, 구박하는 친척, 시설 등에서 자란 아이들의 흐느낌이 너무 아파서 혹시 그들이 또 다른 가해자로 성장하지 않을까 겁이 나기도 합니다. 피다만 꽃송이도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살기 힘들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엄마 품에는 어린 아기가 있었고, 약을 먹고 죽은 아빠 품에도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 아이를 무참하게 살해해서 연약한 우리 아이들의 비극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가슴을 저미게 한 적도 있습니다. 소외당하는 아이, 집단폭력에 시달리는 아이, 외모나 성적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들의 숨죽임도 있습니다. ‘크게 비명을 질러라. 그래야 우리가 알지.’ 선생님과 부모님은 호소합니다만, 아이는 그들만의 세계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혜진이와 예슬이를 살해한 남자는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사는 이웃남자였다니,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부모들은 개탄하고 있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순종적이고 내성적인 아이가 남의 꼬임에 쉽게 넘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이들은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산의 초등학생은 용감했습니다. 차이고 휘둘려도 끝까지 반항한 덕분에 자신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아파트 였으니까 가능한 일이었지 아무도 없는 들판이었다면 위험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부모와 선생님은 아이들이 제일 먼저 찾는 SOS가 되어야 합니다. 아이가 부모나 선생님과 등을 돌리면 활은 이미 시위를 떠난 것과 같습니다. ‘내 아이 지키기!’는 이제야 ‘우리 아이 지키기!’로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습니다. 다만 어느 순간에만 반짝이는 슬로건이 되지 말고, 때 지난 현수막처럼 구호에만 그치지 말고, 지속적인 실천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한 아이도 사각지대에 노출되지 않도록,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성격장애)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둥글게 둥글게 인간띠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울고 있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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