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인지 법에도 별명이 많다. 연방 공법 107-110호는 ‘어떤 아이도 뒤처지면 안 된다 법(No Child Left Behind Act)’이 속칭이다. 정식 명칭이 있어도 제안자 이름에 법(Act)만 붙여 부르는 것은 일상화됐다. 금융개혁을 위해 도입한 법이 글라스-스티걸법이다. 노사관계법인 태프트-하틀리법, 전국노동관계법인 와그너법, 국내안전보장법인 매카란법이 모두 그렇다.
강화된 정치자금법을 애칭처럼 우리도 ‘오세훈법’으로 부르기는 했다. 요즘 오세훈 서울시장은 ‘수도권 대기환경에 대한 특별법’을 ‘오세훈법’으로 불러주길 원한다. 일명 ‘혜진·예슬법’을 제정한다고도 한다. 이 경우, 입법 취지에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끔찍한 성폭력 피해자인 어린 영혼들의 이름을 법률명으로 쓰는 것이 우리 문화의식에 맞는가는 의문이다.
법과 제도에 있어 미국을 따라잡으려면 흉내낼 것들이 그러고도 상당히 많이 남았다. 텍사스에서 성범죄자의 집과 자동차에 성범죄자이니 조심하라는 경고판을 부착하는 것, 캘리포니아에서 아동 성학대자에게 성욕 억제 약물주사나 거세 중 택일하도록 하는 것도 그것이다. 논란 아닌 논란이 된, 피해자 이름을 딴 법률도 그중 한가지다.
그들이라고 인격권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혜진·예슬 이름이 남으면 아동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 홍보효과는 극대화할지 또 모른다. 하지만 법은 강화하면서 가엾고 가여운 두 이름표를 법전 아닌 우리 가슴에 뼈아프게 새겨놓는 쪽이 더 좋겠다. 성(性)금수들을 엄중히 다스려 완벽하게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식지 않으면 된다. 플로리다의 제시카 런스포드와 안양의 혜진·예슬은 같으면서 같지 않을 수 있다. 안과 밖은 늘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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