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전 한남대 사회문화대학원장/대전연극협회장 |
또 다른 지배요소는 도덕률과 계율과 같은 성스러운 규정의 힘이 작용한다. 이런 현실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된 탈현실의 공간이 놀이의 공간이다. 거기는 오직 자유의지가 제어 받지 않고 활개 치는 곳이다. 어떤 꿈을 꾸더라도 상해 당하지 않으며 비난 받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분리의 공간은 통상 주어진 현실을 뛰어넘는 그림들을 그려낸다. 바로 그것이 '어느 곳에도 없는 곳'인 유토피아이다.
예술은 모두 그런 유토피아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현실이 갖지 못한 것들을 그곳에 장치하고 설계하고 꾸며냄으로 그런 놀이의 자유공간은 현실과 대비되고 그 대비는 현실 부정의 양상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사실 모든 예술은 거스름의 속성을 그 자체에 지니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거스름의 방향이나 질료(質料)가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이다.
역사는 그 거스름의 변화 양상을 알려준다. 현실을 결정하는 요소가 정신이냐 아니면 물질이냐 하는 논쟁은 태고 이래로 진행된 대립 쌍이다. 정신의 우위는 중세 기독교와 계몽주의를 거쳐 헤겔에 이르기까지 강고한 관념주의 안에서 유지되었다. 철학적으로 관념론을 마지막까지 지켜낸 수호장이었던 헤겔을 깨뜨린 것은 마르크스였다. 공산당 선언으로 시작하여 그의 대작 자본른을 통해 그는 명백히 물질조건이 인간의 의식을 결정함을 선포한다.
문학사적으로 정신과 물질의 대립관계는 고전-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대립으로 변한다. 19세기 초반부터 인간의 물질적 조건을 문제 삶은 예술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것은 그저 문화 영역에서만도 아니었다. 정치적 관념론이 무너지고 유물론적 정치체제가 폭발적으로 등장했던 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실제적 정치적 앙샹레짐이 무너진 것이었다. 바로 이때 좌파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예술분야에서 좌파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누군가를 재단하는 일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좌파를 원래의 의미대로 의사당 좌석의 좌편에 자리잡고 있으며 평등지향적이며 현실개혁적인 부류를 지칭하는 말이라면, 본질적으로 좌파적 속성을 지닌 예술을 또 다시 갈라 상표를 억지로 붙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 장관이 이념이 다른 전 정권 기관장의 퇴진을 요구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이때 그가 적시한 ‘생각이 다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명확히 하지도 않았고 법으로 정해진 임기 단축을 요구하는 이유도 밝히지 않았다. 그것도 퇴진 대상들이 문화 관련 분야 활동 인사들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완장`의 호령으로 받아들여 쓴 웃음을 지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라며. 정치는 예술을 이용하고 싶어 한다. 이해할만 하다. 하지만 정말 이용하면 예술은 정치에 독이 된다. 히틀러가 괴벨스를 통해 문화를 정치화해서 일시적으로 득을 보았지만, 역사는 그들을 영원히 문화를 망친 범죄자로 규정했다. 우리 지역에서도 그럴 기미가 읽힌다. 서로 주이해야 할 터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