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철중 대전 문예의 전당 후원회장 |
글링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서곡에서, 수준 높은 악단은 예열이 필요 없이 바로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지휘자에게 거의 눈길을 주지 않는 중후한 단원들의 솜씨는, 최재천 교수가 주장하는 통섭(統攝)이론 중, 자율적 조직화(Self Organization)를 연상케 하였다. 저마다 무르익은 솜씨가 모여 저절로 통일을 이루며 뚜렷한 개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휘자 쟌 안드레아 노세다와 오케스트라의 합작품은 밝고 활기찬 곡에 걸 맞는 따뜻한 음색을 선사하였다.
두 번째 곡은 대전의 자랑 조이스 양(양희원)씨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2년 전 마젤의 뉴욕 필과 협연 보다 훌쩍 성장한 느낌이었다. 해머처럼 강하게 두드리는 파워와 빠르고 여린 대목에서는 건반에 코를 박고 구슬을 굴리는 듯한 섬세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첼로의 장한나가 자신의 연주하는 모습을 묻자 어느 초등학생이 “골룸(반지의 제왕) 같아요.” 했다는 대답처럼, 몰아의 엑스타시에 빠진 대가의 표정을 읽었다. 템포를 자신의 페이스로 이끌어가는 조이스의 카리스마와 그것을 받아들여 하나로 융합하는 지휘자의 널널함은, 웅장한 베토벤식 오케스트라가 피아노를 압도하지 않고 함께 상승하는 성공작을 빚어내었다.
간간히 한 호흡씩 쉬어가는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 6번 비창에서는 여백의 미를 중시하는 한국화적인 슬픔이 묻어난다. 그 공백 속에서 첫 공연 일주일 만에 독약을 마신 작곡자의 한숨소리를 듣는다. 바순과 비올라의 느릿한 저음으로 시작하는 서주부로부터 지휘자가 까치발로 비상할 듯 춤추는 열광을 거쳐, 다른 심포니와 달리 숨이 끊어질 듯 조용한 마무리까지, 필자의 기억에 오래 남을 명연주였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마에스트로와 악단에는 무어라 평을 달을 수가 없다. 다만 연주가 끝나도 돌아서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인 십초 쯤, 예의 묵념과 같은 지휘자의 세리모니에 조용히 동참한 대전시민의 성숙함에 박수를 보낸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환희나 차이콥스키의 비창이 끝난 뒤 앙코르는 사실상 감동을 깎아내리는(Anti-climax) 의미가 있다. 자칫하면 경건함 또는 비장감의 여운을 잃으니까.
그래서 뽑은 한 곡의 앙코르곡 그리그는 조용한 애잔함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동네 아저씨 같이 친근감을 주면서도 때로는 불같을 정열을 내뿜는 노세다는, 모두가 대가인 단원을 잘 이끌어, BBC 특유의 개성과 차분하고 따뜻한 음색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한, 재능과 성실함을 두루 갖춘 행복한 지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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