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경동 중문침례교회 목사 |
못해도 일주일에 여러 장르의 책들과 성경강독 그리고 묵상과 기도를 한다. 이에 하나 더 챙기게 된 일은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매체의 프로그램들을 찾아보는 일이다.
늦은 밤 숙소에 돌아와도 잠이 들기 전에 끼니처럼 매체를 통해 뉴스는 기본이고 의미 있는 여러 분야의 프로그램을 보면서 다양성 있는 지적 정보를 내 삶과 강의 자료로 적용해 보곤 한다.
한번은 우연히 방송에서 조선 영조 왕이 승하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난다.
영조는 숙종이라는 성군의 아비를 두었으나,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갈등 속에, 제3의 여인 무술이 숙빈 최씨의 아들로 태어나 언제나 반(半)천출, 서자라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왕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항상 엄격하고 무서운 임금이었다.
그러면서도 검소하며 백성을 우선시하는 임금이었다. 임금답지 않게 얇은 옷과 거친 음식의 수라를 들었고, 여성들의 또아리를 튼 머리를 뒷 쪽진 머리로 바꾸었다.
또 다른 장면 하나. 노환이 짙은 영조가 문득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죽음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저잣거리로 찾아 들어간다. 백성을 돌보던 임금이, 아니 섬기던 성군이 그 끝을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루미도 죽기 전에 자신이 태어난 곳을 보고 마지막 울음을 울고, 원숭이도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 거목(巨木)밑에서 거름으로 보시를 한다. 대나무 숲은 죽기 전 해에 마지막 꽃을 피운다고 한다.
금수도 그러한데 이와 같이 천수를 누리는 어르신들은 자신의 때를 감지하는 영감을 타고 난 모양이다.
시장에서 한 노점 상인과 영조는 대화를 나눈다. 지금 누리고 있는 태평성대를 늙은 상인은 오직 임금의 은혜라고 말했다. 물론 임금은 일반 선비의 도포와 갓을 썼으니 그가 누구인지는 모를 일이다. 모든 것이 지금 주상의 승은이라고 말하는 노인에게 영조는 무슨 늙은 임금이 백성에게 은혜를 주었겠냐고 핀잔을 한다. 그러나 노인 장사꾼은 농담이라도 나랏님을 욕해서는 안된다고 조아리며 타이른다. 무식하고 부족한 천출인 자신을 먹이고 살려 주신 이는 오직 주상이라고 믿는 백성.
지금 우리는 물론 왕정의 정체를 가진 대한민국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을 가진 국민으로서 이 땅에 살고 있다.
왕정에서는 계급사회가 존재했고 타고난 자신의 신분에 대해 불만보다는 자족하며 임금이 주시는 은혜를 백성들은 소망하며 살았다. 민주정치의 사회에서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으로 그 대표자인 대통령을 선출하여 나라의 전반적인 살림을 맡긴다.
굳이 따지자면 전자는 주인으로, 후자는 청지기로서의 신분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둘의 직업은 공통점이 있으니, 백성과 국민을 위하는 것이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율곡의 가르침도, 대한민국 헌법에 ‘국민이 주권을 가진다’는 말에도 무엇과 누구를 우선시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한다.
영광스럽게도 나는 다수 국민들을 대표하여 새 대통령 취임식에 하객으로 참여하였다. 만감이 오가고, 감격과 기대가 교차한다.
영조는 뜻을 세워 백성을 돌본 것이 아니라, 백성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우선이었다. 반면 오늘날 브레인이라는 엘리트 정치가들은 내 뜻을 세워 국민들을 교화하고 길들이려 한다. 새 정부가 실용주의를 내세운다면, 국민의 필요를 채우는 정치가 올바른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의분의 눈물을 흘렸다. 예수님은 리더가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어진 양들의 안녕이 최우선이라고 가르치셨다.
영조가 ‘백성이 기뻐하는 임금’을 이룬 것처럼 우리는 ‘국민이 기뻐하는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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