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종호 충남대 국문과 교수 |
민족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인류는 교육의 의미와 목적과 기능을 자신의 민족과 국가, 그리고 세계가 축적한 지식을 전하는 것으로 간주해 왔다. 이러다보니 모든 교육내용은 지혜보다는 지식을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두게 되었다.
지식이 단순한 앎이라면 지혜는 응용된 지식을 의미한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부터 시작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0년이 넘게 공부를 하지만 학교는 스스로의 몸에 관한 성적 특성과, 타인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법과 같은 인간관계에서 꼭 필요한 것들은 정작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권력의 이해, 타인을 존중하는 법, 관용, 공평함, 경제의 윤리, 정직과 책임, 과학과 영성과 같은 다양한 가치 중심의 교육은 아예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7차 교육과정을 보완, 개정한 2007년 개정 교육과정 역시 고등학교 교과의 경우 생활과 철학, 생활과 논리, 생활과 심리와 같은 교양과목을 제시하고 있으나 학교 현장에서 구체적인 수업이 진행되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대학입시에 매달리고 있는 학교의 현실이 그것을 수용할리 없기 때문이다.
인류 사회에서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앞선 세대가 후세대에게 폭력 없이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거나 실패했기 때문이다. 인류 사회에서 성범죄가 그치지 않고 미혼모가 증대된다면 그것은 앞선 세대가 후세대에게 올바른 성교육과 애정 관계의 요소들에 관해 교육을 실시하지 않았거나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학교는 편견을 지닐 수도 있는 학부모들로부터 벗어나 학생들에게 가장 좋은 교육을 제공할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문명화된 사회의 기본이 되는 개념들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지혜를 가르치는 교육은 오히려 사회교육 기능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종 사회단체나 기관에서 실시하는 동서양고전 특강, 인문학 강좌, 청소년 인성교육 등이 그것이다. 필자가 운영하는 새빛문화아카데미의 강좌 중에 ‘삶을 위한 죽음학’이라는 강좌가 있다. 강좌명은 모리 슈워츠의 “죽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됩니다”라는 시구에서 따온 것이지만, 죽음에 관한 강의가 가능한 것은 이미 연구가 심화되어 죽음학(Thanatology)이라는 학문적 영역이 새롭게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한 학기 강좌가 끝난 연말에 수강생 중 한 명이 내 집을 찾아 왔다. 이미 80이 가깝지만 6·25 참전 용사로서 예비역 영관장교인 그 는 한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면 악몽과 두려움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는데 죽음의 세계를 포괄적으로 이해한 후부터는 편안히 잠들 수 있게 되었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지식을 뛰어넘은 삶의 지혜가 그 분에게 평강을 가져다 준 셈이다.
지식이 흩어져 있는 구슬들이라면 지혜는 그것을 하나로 꿰는 실과도 같다. 지혜를 강조하면서 지식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적용되기 어려운 지식, 비판적이며 논리적인 사고와 문제 해결능력과 창의력을 길러주는 지혜가 아닌 지식 중심의 교육이 계속되는 한 선진한국의 건설은 기실 요원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대통령은 ‘실용시대’의 개막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선진한국의 건설을 위해서는 교육개혁의 실용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단순한 정책대안이 아니라 가치를 변화시키고 인간을 변화시키는 지혜의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앞으로 개편될 교과서에 대한 기대가 큰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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