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선]도시락(挑始樂)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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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선]도시락(挑始樂) 세대

[시사에세이]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승인 2008-03-10 00:00
  • 신문게재 2008-03-11 20면
  •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정영진은 열한 살 무렵부터 내복의 실밥을 뜯어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두세 시간 정도 일을 하고나면 목이 뻐근해지고 쪽가위를 든 손은 곧장 마비가 왔다. 한 벌에 40원을 벌었다. 야채를 담는데 쓰는 바구니 만들기 아르바이트도 했다. 합성수지로 된 빨대를 휘감아야 하는 작업이었는데 손끝은 까맣게 변하고 보름여가 지나면 손끝이 갈라졌다. 하나에 80원을 받았다. 플라스틱 손잡이 구멍에 나사를 하나씩 꽂고 망치로 두드리는 TV 리모컨 제작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열한 살 정영진의 집게손가락에 늘 피멍이 들어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아르바이트 행진은 끊이지 않았으나 주눅 들지 않고 씩씩하게 일했다. 꿈이 있었다.

그렇다고 인생역전의 대하 드라마 주인공들 마냥 정영진의 학업 성적이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IMF 후유증을 겪던 시기라 대학 졸업 후 취업도 여의치 않았다. 서울 명륜동 꼭대기에 지하 월세 방을 얻어 방송사 기자 시험을 준비했다. 일 년 만에 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했다. 1년 후에 다시 시험을 치렀다.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입사 준비를 했지만 방송사의 1차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대전의 어머니한테서 “시험 잘 치렀느냐”고 전화가 걸려왔다. 결과가 나오면 알려주겠노라고 거짓말을 했다. 며칠 후 정영진은 월세 방의 짐을 꾸려서 대전행 고속버스를 탔다.

대전에서 그는 인터넷 쇼핑몰을 만들어 신발 장사를 했다. 재미가 쏠쏠했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 진 빚들을 갚았고 통장에 돈을 모아나갔다. 3년 남짓 즐겁고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마음 한편에서는 자신의 꿈에 대한 불안과 반성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방송사 시험 준비를 하다가 좌절한 동료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현실 안주를 정당화해보기도 했으나 자신이 게으르고 비겁하다는 생각까지 덮어주지는 못했다. 꿈의 실현을 위해 도전해 보지도 않고 미련을 갖는 것보다 ‘죽을’ 각오로 열정을 다해 보자고 마음을 추슬렀다. 어머니가 청국장을 끓여주던 다음날, 정영진은 방송인이 되기 위해 다시 서울로 향했다.

시사뉴스를 제공하는 개인 인터넷방송을 진행하다가 MBC 아침방송 프로그램의 리포터 시험에 합격했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상당히 먼길을 돌아서 방송인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장애물은 여전히 높았다. 구강구조상 ‘시옷’발음이 여의치 않았고 리포터로서 텔레비전에 얼굴이 오랫동안, 자주 노출되는 것도 아닌데 매번 분위기에 맞는 의상을 확보하는 일도 벅찼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정영진은 KBS ‘퀴즈 대한민국’에 도전장을 냈다. 2006년 4월 24대 ‘퀴즈영웅’이 돼 2000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리포터로서 관성을 깨기 위해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정영진은 ‘1대 100’퀴즈프로그램에도 도전해 최초의 우승자가 되었다. 5000만원의 상금이 주어졌다.

연거푸 두 개의 프로그램에서 ‘퀴즈 왕’이 된 정영진은 녹록지 않은 꿈을 공공연하게 밝혔다. ‘100분 토론’의 손석희, ‘생방송 심야토론’정관용 진행자의 자리를 빼앗아보겠다는 것이다. 매끄럽게, 쉽게 그리고 치우침 없이 진행하는 것은 두 사람만큼 할 수 있고 ‘재미’ 있는 진행으로 시청자의 선택을 받는 것은 더 자신 있다고 말했다. 2008년 현재로서는 역부족이지만 아직 공부할 시간과 경험을 익힐 기회가 얼마든지 주어져 있기 때문에 10년 후에는 대적해 볼 만하다는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도 정영진 자신의 편이어서 두 거봉 토론자들에게 2018년 이후 방송사의 토론 프로그램 스튜디오에서 한판 붙어보자고 도전장을 냈다.

정영진은 작년 가을 방송사 리포터 일을 잠시 접고 10년 후의 꿈을 준비하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0년 전에 정영진과 필자는 학생과 시간강사로 처음 만났다. 정영진이 며칠 전 자신의 도전 이야기를 담은 책을 보내왔다. ‘도전을 시작하는 즐거움’이란 뜻의 『도시락 (挑始樂) 세대』다. 우리들 각자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라면서 나이가 드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 도전을 하지 않을까봐 두렵다고 고백한다. 기회는 항상 저지르는 자에게 올 거라고 말한다. 꿈을 향한 서른네 살 정영진의 도전은 진행 중이다. 그대 그리고 나, 우리에게도 꿈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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