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선균 3·8민주의거 기념사업회 사무처장, 우송정보대학 교수 |
야당의 선거유세 방해, 공무원의 공공연한 선거운동, 유령단체들을 내세운 폭력행사, 학교의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을 내세워 학부들을 3, 4인조로 편성하여 선거운동에 동원함은 물론 투표를 하도록 획책하였고, 학생들을 각종행사에 동원하였으며 수업시간을 중단하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미화된 사상과 담화문 등을 듣도록 교내 방송하고, 정부여당지인 서울신문을 강제구독케 하는 등 권력만행의 극치였다.
4·19 혁명의 시작은 2월28일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내면적으로는 당시 계속 되어온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부정선거 획책, 그리고 신성한 학원의 정치적 간섭 등에서 누적된 불만으로 야기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일요일인 데도 불구하고 야당인 민주당의 선거유세에 학생들이 가지 못하도록 전원 등교토록 했다. 이에 경북고등학교 학생 등 일부 대구시내 고등학생들이 등교를 거부하고 거리로 나서 자유당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에 항거하는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경찰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해산시켜 부상자가 생기기도 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대전의 고등학생들도 3월8일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민주당 유세시간에 맞춰 일제히 거리로 나서 독재정권을 타도하자는 항의시위를 하기로 결의 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정보에 걸려 다른 학교학생들은 철저히 봉쇄 당하고, 대전고등학교 학생 1000여명이 학교담을 뛰어넘어 부사동 공설운동장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무장경찰과 기마경찰의 저지와 소방차의 물펌프 속에 시위 학생들은 시내일원으로 흩어졌고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남은 학생들은 대전역 광장에 모여 다시 도청까지 시위를 했다. 이어서 3월10일 대전상고학생 1000여 명을 중심으로 대전공고, 보문고, 대전여고 등 일부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했다. 이를 계기로 마산의 3·15 부정선거 규탄대회로 이어진 학생시위는 4·19혁명 때 까지 전국으로 퍼졌으며 결국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
3·8 대전 민주의거는 대구에 전국에서 두 번째로 일어난 역사적 학생 민주화 운동이었다. 대구의 2·28의거가 일요일에 등교하라는 학교당국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거사라면, 3·8의거는 진정한 학원 민주화와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에 항거한 고등학생들의 자발적이며 순수한 정의감에서 일어났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3·8의거는 충절의 고장 충청도의 선비정신이요, 나라사랑 정신이요 또한 자유시민 정신의 발로이고 민족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역사적 사명감이라는 소명의식이었다. 우리지역에서 발생한 4·19혁명의 단초가 된 3·8민주의거 정신이 아직도 계승 발전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2월 28일은 대구시민의 날로 지정되었고, 3월 15일은 마산시, 경남도민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이에 3월8일을 대전시민의 날로 지정하자. 또한 둔지미공원에 3·8민주의거 기념비가 제막되어 있다. 이제 둔지미 공원이라는 명칭 대신 민주시민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자. 관계 당국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한 시대 혁명의 도도한 물줄기의 흐름을 더욱 증폭시켰고 애국애족정신을 계승한 3·8 민주의거는 3월의 훈풍처럼 오래도록 우리 역사와 혼 속에 남아 계승되어야 할 민주화를 처음으로 제창한 자유독립만세 운동이다. 대전 시민의 정신으로 후손들에게 계승 발전시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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