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덮친 6000t 검은 재앙
2. 기름 오염 재앙에 맞서 다시 일어난 일본
3. 기름 피해 이후 달라진 일본의 방재 행정
4. 기름 피해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5. 죄담회
1. 일본덮친 6000t 검은 재앙
`서해안 원유 유출 사건`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 중 하나가 위험 불감증에서 시작된 허술한 방제체제와 부실한 방재대처이다. 기름 유출 사고에 대한 방재대처가 부실한 상태에서 방재대책만 세우려는 욕심을 앞세우면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일이 매번 반복될 수 밖에 없다.
본보는 본격적으로 정책 제안 및 대안이 마련되는 시점에서 기름 피해를 본 일본 후쿠이(福井)현과 이시카와(石川)현, 시마네(島根)현 일대를 다녀왔다. 당시 기름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 주민들과의 인터뷰, 관계 기관과 행정 당국의 자료취합 등 다양한 방법으로 기름 유출과 관련된 피해와 극복사례를 취한 결과 한국이 일본에 비해 다양한 성과도 있었으나 아직은 보완해야 할 점이 더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 본보는 그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고자 매주 한 차례씩 5차례에 걸쳐 앞으로의 방제작업이 실속있게 추진되기 위한 과제와 대안은 무엇인지 종합적인 점검을 한다. <편집자 주>
타카키 교수가 재직 중인 가나자와대학은 러시아 선적 유조선 나홋카호(1만3257t.승선원 32명)가 좌초한 시네마(島根)현 오기섬과는 차로 2시간가량 인접해 있었다. 그는 사고 이후 지금까지 기름 오염과 관련된 연구를 계속해왔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역불급(力不及)`이라는 말로 함축했다. 이어 "러시아 선박 좌초 당시에는 지금 상황보다 훨씬 안 좋았다"며 "폭설, 태풍 등 기상재해까지 겹쳐 한 달 간은 거의 손을 쓰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의 승합차로 당시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 중 하나인 와지마 해안도로를 타고 20여분 달려 아침시장에 도착했다. 칠기 명산지로 각광받고 있는 이곳은 특산품 상점과 갖은 해산물을 판매하는 노점상들과 함께 어우러져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관광지로 유명하다. 그러나 러시아 선박 나홋카호가 침몰한 1997년 1월2일 이후 선박에서 흘러나온 중유가 일주일 만에 이곳까지 흘러들면서 기름 오염 소문 때문에 시장 상인들은 1년가량 생계를 이어가기가 힘들었다고.
특히 이곳은 사고 당시 2등분된 나홋카호 선수부가 거센 파도에 밀려 동쪽으로 5일간 표류하다가 후쿠이(福井)현 미쿠니(三國) 해안에서 좌초되면서 흘러든 중유가 6개월 가까이 제거되지 않아 인근 상인들만 고스란히 피해를 보게 됐다. 이곳에서 성게, 게, 김 등을 판매하는 시장 상인 아라이(嘗井.여.53)씨는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당시 시장 내 상점이 한 달간은 문을 닫았었다"며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자위대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기름 제거 작업에 동참했기 때문에 장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가뜩이나 경기불황으로 장사가 잘 안 되는 상황에서 기름 피해까지 겹치면서 많은 상인들이 사고 이후 이곳을 떠났다"고 했다. 잠시 후 시장을 빠져나와 차로 3시간 가량 달려 `30만 명의 기적`으로 잘 알려진 미쿠니 마을로 향했다. 유조선이 침몰한 오기섬 인근에 도착하자 당시 미처 닦아내지 못했던 갯바위에 묻은 기름이 풍화 작용 때문에 딱딱하게 굳어있어 당시 참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미쓰히라(光平.66)씨는 "현재 일본 정부에서는 완전한 복구가 이뤄졌다고 하지만 당시 주민들이 입은 정신적 충격은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선미부는 수심 2500m 해저에 침몰하고, 선수는 풍속 20㎧, 6m 높이의 파도에 밀려 동쪽으로 5일 간 표류하다가 1월7일 후쿠이현 미쿠니시 해안에서 약 150m 떨어진 곳에 좌초됐다.이 사고로 절단 부 화물창의 중유(벙커 C) 3700t이 순간적으로 유출됐고, 이후 침몰한 좌초선체로부터 2500t 중유가 추가로 쏟아졌다.
유출된 기름은 일본 본토 시네마네현에서 이시카와현까지 6개현 해안(480㎞)에 표착됐고, 특히 서쪽해안의 도토리(鳥取)현, 이시카와현, 후쿠이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해안이 심하게 오염됐다. 해상은 사고초기 유출된 기름이 에멀젼 형태로 변한 기름과 두터운 기름 띄가 형성됐다. 해안선에는 짙은 검은색의 기름이, 만곡부에는 무스 상태의 두터운 기름층을 형성했다.
△사고 이후 방제 조치 및 방제 작업=해상방제는 해상보안청이, 해안 부유기름 수거는 지자체가 주관이 됐다. 지역주민들은 자원봉사대를 관리했다. 사실상 현장 방제작업의 총괄은 해상재해방지센터에서 관장해 계획을 수립하고, 기자재동원, 수거된 폐유의 처리 등을 맡았다.
당시 중앙에 운수대신을 본부장으로 하는 14개 성, 청의 국장급으로 하는 정부재해대책본부를 구성했으나 실제는 자치단체별로 설치된 대책본부 및 재해방지 센터 현장본부를 중심으로 방제작업이 진행됐다. 해상재해방지센터는 중유가 쏟아진 2일 뒤부터 사고선 선주로부터 위탁을 받아 직원을 현장에 파견해 장제조치에 나서기 시작했다.
업무는 초기의 해양 및 연안에서의 회수활동, 반출방법과 처리장의 확보, 사용 후 방제장비의 정비, 청구사무 등에 대한 업무였다.해상재해방지센터는 1월14일 해상안정청 장관으로부터 선수부 잔존유의 이적을 지시받아 해상에서는 선박을 이용하고, 육상에서는 가설도로를 건설해 이적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가설도로 철거작업은 이듬해 3월에 종료됐지만 현지 어민의 작업종료 동의를 얻는 데는 사고 발생 2년 뒤인 1999년 7월이 되서야 가능했다.
당시 기상 상황은 강한 눈을 동반한 태풍까지 겹치면서 선박 회수 및 기름이적 작업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해안 오염의 최소화를 위해 해상회수 및 표착유의 재 유출을 방지 계획을 세웠지만 기름 제거 선박, 강력 흔인차 등 차량의 확보와 회수된 기름의 관리, 반입장의 확보와 반출처리 문제에 대한 긴급 상황이 반복되기도 했다.
해상 방제 장비로는 수로준설선 스시호 5척, 일본 내 석유회사 소속 유회수선 3척, 이동용 스키머 등이 사용됐다. 연안에서는 강력 흡인차, 큰크리트 펌프차를 이용해 해수면의 기름을 빨아들인 뒤 기름통에 담아 처리했다. 해안에서 회수된 드럼통은 다이어프램 펌프를 활용했다. 해안가로 흘러든 기름 제거작업은 주민들을 비롯해 관광협회 직원, 각종 단체, 시군청의 직원, 초,중,고교생, 경찰관 및 자위대, 자원봉사대가 동원돼 기름과 사투를 벌였다.
또 피해가 컸던 이시카와현 등의 해안에서 회수된 기름의 대부분은 드럼통에 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근처 항구에 트럭 등으로 운반돼 화물선으로 이송됐다. 당시 이송에 사용된 선박은 490t급으로 2500-3000개의 드럼통을 폐기물 처리시설로 이동했으나 처리 후 남은 빈 드럼통을 한 동안 처분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드럼통 이송에는 트럭과 철도화물이 이용됐다.
특히 기름 오염 피해가 심했던 가나자와 해안 일대 암벽 위에 만들어진 임시 저장소에 모인 기름은 결국 강력 흡인차에 의해 근처의 처리장으로 반출됐다. 처리장은 논을 파서 만들었기 때문에 방수가 제대로 안 돼 또 다시 회수해 나가노(長野)현의 매립지로 이송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이에 대해 후쿠이현청 관계자는 "수거된 기름은 처리시설의 설비와 구조에 의해 반입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으로 나뉘었다"며 "그을음은 자체적으로도 함수율이 높아 소각이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염소의 함유량이 많아 다이옥신 및 대량의 클링커를 발생시킬 우려가 있어 소각 온도 등에 세심한 주위를 기울였다"고 말했다.
관계자는 이어 "수거된 기름에는 기름 외에도 기름으로 오염된 로프, 망, 오일펜스, 목재, 모래 등 각종의 물질이 들어있어 작업이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처리시설이 파손되는 경우가 늘어났다"며 "특히 소각 작업 시 분리 소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제대로 걸러지지 못한 오일펜스 방추(납)는 그대로 소각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한편 해안에 좌초된 선수부의 선체인양을 위해 매립준설협회 7개사의 연합체가 주관한 가설도로 건설은 1월15일부터 2월9일까지 26일이 소요됐다. 선체는 조각으로 절단돼 4월20일 인양이 완료됐으나 철거는 이듬해인 1998년 3월에 완료됐다./조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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