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은 틈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견고한
제 형식을 무너뜨리느라
어둡고 추운 밤에 기대어 바람을 들이고 있다
―김상숙 ‘물렁물렁한 벽’
그때도 담은 있었지만 심정적으로 어디가 공동체이고 어디가 집안인지 모호했다. 젊은 아주머니 상당수는 나를 ‘도련님’으로 불렀다. 어쩐 일로 내게 모두가 형과 누나였고 삼촌이었다. 어머니의 자매를 어머니로, 아버지 형제를 아버지로 부른 휴런족 사회보다 더 끈끈했다. 끈끈함을 빌려 규중처자의 가슴을 보여달라고 염치없이 졸라대기도 했다.
한번은 집안 누님의 전통혼례에 따라갔다가 신랑신부 틈에서 하룻밤을 잤다. 주인과 하인이, 부인과 하녀가, 하류층과 손님이 섞여 잠자던 중세, 첫날밤 신혼부부를 도와준다며 동네방네 사람들이 같은 방에서 잤다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중세의 영역, 그보다 심했다. 창호지에 뚫린 무수한 구멍과 무수한 눈들! 누님에게 지금도 미안하다.
중죄를 짓고도 나는 무사했다. 야틈한 돌담, 안을 보면 보이는 싸리 울타리였을 때의 후덕한 인심 덕이었다. 담으로 이바지가 오갔고 정다움이 넘나들었다. 옆집 여자애를 보려면 발돋움해 넘겨다봤다. 직설법의 담은 담이면서 담이 아니었다.
그런데 공간적 벽을 종횡무진 넘는 네트워크 사회에서 “잠을 자도 모르겠다”는 대통령의 일침에 청와대 책상분리대(파티션)가 소통 두절의 주범(?)으로 전락했다. 창의적 마인드에 거치적거리지 않고 업무 집중도에 이로운데도 눈치 코드로 없애면 너무 애꿎다. 보이는 파티션과 보이지 않는 벽 중 리노베이션(혁신) 대상은 무엇인가.
파티션 조각보다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S(서울시)라인, 강부자(강남 땅부자) 인사가 더 획일한 벽을 쌓을 수 있다. 도배하려다 벽 부순다며 호떡집에 불난 듯한 여야의 공천도 마찬가지다. 국민을 가로막는 오만의 벽, 직설법의 벽 이전에 은유법의 벽부터 치워야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인 담은 열릴 것이다. 무리하면 담벼락을 문이라고 내미는 억지가 또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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