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요한 목원대 총장 |
설령 그것이 내 인생 경험의 장이라 하더라도 약간(?)의 아픔이 섞여져야만 삶의 활력을 느끼는 것은 알 수 없는 인생의 신비다.
지난주 중국에 있는 모 대학과 교류관계를 성사시키기 위해 북경을 방문했다. 그 곳에서 참 아름다운 한 여인을 만났다. 그리고 그 여인의 삶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슬픔과 아픔 그리고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갖게 됐다.
그 여인은 북경에 있는 모 대학에서 무용을 가르치는 교수다. 중국 최고의 실력으로 벌써부터 종신 교수직을 부여받은 실력자다. 나는 사실 이 여교수를 한국에서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우리 대학과 교류하는 일 때문에 내 사무실을 몇 번 방문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여교수가 대단히 아름답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내 기억에는 너무 지나치게 얌전하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런데 이번 중국여행 방문길에서 나는 그 여 교수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됐다. 여교수의 부친이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나는 궁금증으로 그럼 어머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여 교수는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어머니는 일본인라고 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또 물었다. “남편은…?” 옆에 있던 통역인이 대신 “중국인입니다”라고 했다.
순간 내 얼굴에선 무의식적으로 중국 여교수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있었던 것 같다. 내 얼굴 표정을 읽은 여 교수는 나에게 자신에 얽힌 슬픈 얘기를 통역인을 통해 털어놓았다.
“아버지는 한국인으로 일찍 일본으로 유학가 의술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같은 대학을 다니던 일본 여성을 만나 결혼했다. 결혼후 두 분은 일본에 살 수도 없고, 또 한국에 가면 일본사람들 밑에서 일을 해야하는데 그것이 싫어 제 3국인 중국 하얼빈으로 와 평생을 살았다. 부모님은 철저한 기독교인으로 중국 공산주의 아래 평생 엄청난 박해를 당했다. 나도 얼마전까지 중국사회에서 나의 정체성을 철저히 숨기고 살아왔다.”
여 교수의 시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듯 했다. 어린 시절 장래를 위해 정체성을 숨기고 혼자 북경에서 공부했던 여 교수는 우연히 중국 청년을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이 사랑은 시작부터 암초에 부딪혔다. 한국인 아버지는 중국청년과의 결혼을 절대 반대했고, 결국에는 부모의 허락 없이 두 사람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현재 남편은 중국 정부 기업체의 사장이다.
여 교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80살이 되신 우리 아버지는 남편과 아직 얘기를 안합니다.”
여 교수는 갑자기 부모님이 보고 싶다면서 하얼빈에 있는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마디 주고받은 후 여 교수는 내게 전화기를 넘겨주었다. 부모님이 한국 손님과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전화기를 든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여 교수의 어머니, 정확히 일본인 할머니 여의사 때문이었다.
여교수의 어머니는 또렷또렷한 목소리에 너무도 정확한 한국식 발음으로 한국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할머니가 평생 겪었을 아픔과 기쁨이 순간 내 앞을 확 지나가는 듯 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기독교인으로서 한국인 혹은 일본인으로서 근대 중국 공산주의 사회에서 살아오신 그 분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소녀가 성장하면서 겪은 정신적`사회적 고통, 중국인 청년을 만나 사랑을 키워내 마침내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남편을 크게 성공시킨 감춰진 여인의 지혜와 눈물들.
삶의 비극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국적없는(?) 이 여인의 삶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중국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나는 내 아내에게 중국 여교수에 얽힌 얘기를 전해줬다. 아내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살며시 눈물을 떨어뜨렸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